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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샬러츠빌에 있는 버지니아 대학 로툰다 건물 제퍼슨이 설계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사진은 Dave Hisfra가 찍어 비상업적 사용을 허용한 것임. ⓒ 뉴스타운^^^ | ||
버지니아 주는 역사가 풍부하다. 버지니아는 건국 초기에 4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1대 조지 워싱턴, 3대 토머스 제퍼슨, 4대 제임스 매디슨, 그리고 5대 제임스 몬로 대통령이 그러하니 미국 건국 초기는 ‘버지니아 왕조’(Virginia Dynasty)라고 할 만하다. 보스턴 출신의 2대 존 애담스 대통령이 1797년-1801년까지 4년 단임을 지낸 기간을 뺀 32년 동안(1789년-1797년, 1801년-1825년) 버지니아 출신의 이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리 대통령을 지낸 것이다. 오늘날 버지니아는 이들의 체취가 진하게 배어 있다. 이들이 살던 저택과 농장이 역사유적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버지니아는 남북전쟁 때 남부 쪽에 섰다. 버지니아 주에는 농장 농업이 성행했고, 보스턴 뉴욕 등 북동부 지역과는 많은 점에서 거리가 있었다. 워싱턴 DC와 접해 있는 알렉산드리아는 연방에서 이탈하는 것을 좋아 하지 않았지만 주정부가 그런 결정을 내리자 버지니아의 결정을 따랐다. 반면 버지니아 서북부 지역은 지역대표 회의를 소집해서 연방 탈퇴를 거부하기로 했다. 이 지역은 버지니아 주에서 이탈해서 웨스트 버지니아 주가 되어 남북전쟁 도중인 1863년에 새로운 주로서 연방에 가입했다. 인구가 200만 명이 안 되는 웨스트 버지니아는 광업이 주된 산업이고 평균소득도 낮은 편이고 버지니아와는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향이 많이 다르다.
윌리엄스버그
1607년에 영국에서 온 정착민들이 상륙하여 타운을 처음으로 건설한 곳이 제임스타운인데, 이곳은 버지니아 식민주(植民州)의 수도가 되었다. 그런데 제임스타운에 불타서 파괴되자 1699에 조금 떨어진 미들타운으로 옮겼는데 이곳이 지금의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다. 식민주들이 독립을 준비하게 되자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였던던 토머스 제퍼슨은 수도를 리치먼드로 옮겼다. 윌리엄스버그가 영국군의 침입에 취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버그에는 1693년에 당시 영국의 공동 국왕이던 윌리엄 왕과 매리 여왕의 면허를 얻어 윌리엄 앤드 매리 대학(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이 세워졌다. 하버드 대학 다음으로 오래된 윌리엄 앤드 매리 대학은 성공회 영향 때문에 종교적 색채가 컸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몬로, 그리고 존 마셜 대법원장이 18세기에 윌리엄 앤드 매리에서 공부를 한 졸업생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자기의 모교인 윌리엄 앤드 매리를 별로 좋아 하지 않았는데, 신학을 중시하고 자연과학을 경시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앤드 매리 대학은 남북전쟁을 거치는 동안에 학생들이 남군으로 참전하느냐고 학교를 폐쇄해야 했고, 전쟁이 끝나갈 때는 북군에 점령되는 수모를 당했다. 전쟁 후에도 대학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고, 주 정부의 재원의 도움을 받다가 20세기 초에 아예 주립대학이 되었다. 오늘날 윌리엄 앤드 매리 대학은 유수한 대학의 하나로 뽑힌다. 윌리엄스버그는 봄과 가을의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하며, 식민시대 모습을 그대로 보전하여 과거를 재현한 ‘콜로니얼 윌리엄스버그’는 유명한 관광명소로 뽑힌다.
샬러츠빌
토머스 제퍼슨은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 샬러츠빌(Charlotteville)로 돌아 왔다. 자기가 설계하고 건축한 몬티첼로 저택에 살면서 버지니아 대학(University of Virginia : UVA)을 건립했다. 제퍼슨은 종교적 색채를 배제하고 대신에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학을 세우고자 했다. 그런 영향으로 미국의 종합대학교로 공과대학이 처음생긴 대학이 바로 버지니아 대학이다. 버지니아 대학은 ‘명예 규범’(Honor Code)를 처음 도입한 대학으로도 유명하다. “부정을 해서도 안되고 용인해서도 안 된다”는 규칙이 일찍이 도입되고 그 덕분에 학칙이 엄격하게 된 것도 물론 토머스 제퍼슨 때문이다.
몬티첼로의 묘역에 묻혀 있는 토머스 제퍼슨의 묘비에는 ‘미국 독립선언과 종교의 자유를 위한 버지니아 법령의 기초자이고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라고만 쓰여 있다. 미국 대통령 보다 버지니아 대학의 건립자로 기억되고 싶은 제퍼슨의 생각이 잘 담겨있는 셈이다. 버지니아 대학의 상징인 로툰다는 토머스 제퍼슨이 설계한 건물로 대학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을 지낼 때 국무장관을 지낸 토머스 제퍼슨과 그를 따르는 정파는 공화파(Republicans)라고 불렸는데, 주권(州權)을 중시하고 연방정부는 제한된 권한만 갖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연방정부를 중시하는 존 애담스(2대 대통령)와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이 이끈 연방파(Federalists)와 대립했다. 중앙정부와 주(州)와의 관계에 관한 그 같은 대립이 결국 노예제도를 둘러싸고 남북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버지니아의 많은 도시들이 남북전쟁 때 파괴되었는데, 샬러츠빌과 버지니아 대학은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 전쟁 말기에 북군이 닥쳐오자 도시의 파괴를 막기 위해 시장이 항복을 했기 때문이다.
렉싱턴
블루리지 마운틴 서쪽의 계곡에 자리 잡은 렉싱턴(Lexington)에는 버지니아 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와 워싱턴 앤드 리 대학(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이 있다. 지금도 인구가 6000명 정도인 이 작은 마을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사령관이던 로버트 리 장군과 남군의 탁월한 야전지휘관 스톤월 잭슨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버지니아 군사학교는 1839년에 버지니아 주에 의해서 세워진 사관학교로 지금도 재학생 모두에게 군사교육을 하는 미국의 유일한 주립 사관학교이다.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나오면 학사학위를 받고 장교로 임관을 신청할 수 있지만 당연히 임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졸업하고 임관을 신청하지 않고 다른 직업을 택할 수도 있다. 생도들은 사관학교와 똑같이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받고 전공을 택해 공부한다.
버지니아 군사학교는 남북전쟁에서의 역할로 미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850년에야 건물이 제대로 세워졌고, 1851년에 나중에 스톤월 잭슨이라고 불린 토머스 잭슨이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자연과학과 포술학 교수로 부임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잭슨은 남군 여단장으로 참전해서 초기에 남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생과 생도들이 장교로 잭슨 휘하 여단에 많이 참전했다. 1863년 5월, 잭슨은 챈슬러빌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렉싱턴 묘지에 묻혔다. 1864년 5월에는 생도들이 남군 병력의 구성원으로 뉴마켓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북군을 패퇴시켰다. 한 달 후 북군은 렉싱턴의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포격으로 파괴해 버렸다. 남북전쟁 후에는 한동안 학교를 열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조지 마셜 장군은 버지니아 군사학교가 배출한 자랑스러운 졸업생이다. 패튼 전차군단으로 유명한 조지 패튼은 버지니아 군사학교 1학년을 마치고 웨스트포인트(육사)로 전학을 갔다. 패튼의 조부와 부친이 모두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 군인가족인데, 1학년 때 성적이 너무 나빠서 졸업을 해도 임관이 안 될 것 같아서 패튼의 부친이 힘을 써서 웨스트포인트로 전학을 갔는데, 수학성적이 안 좋아서 패튼은 1학년부터 다시 다녔다. 버지니아 군사학교 박물관에는 스톤월 잭슨이 입었던 군복, 박제화 된 그의 애마 리틀 소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렉싱턴에는 워싱턴 앤드 리 대학(Washington and Lee University)이란 유서 깊은 대학이 있다. 작은 사립대학에 조지 워싱턴이 기부를 해서 대학 명칭을 워싱턴 대학으로 바꾸었다. 남북전쟁 후에 고향으로 돌아온 로버트 리는 워싱턴 대학 총장직을 맡아서 대학을 재건했다. 그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사망한 후 대학 명칭을 워싱턴 앤드 리 대학으로 바꾸었다. 오늘날 워싱턴 앤드 리 대학은 버지니아를 대표하는, 작지만 훌륭한 사립대학이다. 워싱턴 앤드 리 대학의 구내에 리 채플(Lee Chapel)에 로버트 리와 가족이 안치되어 있고 그가 타고 다닌 말 트레블러는 리 채플 문 밖에 묻혀 있다.
리치먼드
1870년에 토머스 제퍼슨이 버지니아의 수도를 윌리엄스버그에서 리치먼드(Richmond)로 옮겨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 의사당을 네오 클래식 양식으로 설계해서 건축했는데, 워싱턴의 의사당과 백악관, 그리고 많은 주의 의사당이 이 양식을 따르게 됐다.
남북전쟁 때 리치먼드는 남부 연합의 수도였다. 당시 남부 연합의 대통령의 집무실이던 남부 백악관 건물이 도심에 남아 있다. 리치먼드를 흘러가는 제임스 강변에는 트레드가 철공소가 있었는데, 여기서 남군의 대포와 총기를 제작했다. 트레드가 철공소는 오늘날 역사유적지와 박물관으로 보전되어 있다.
남북전쟁 중에 북군은 리치먼드를 함락시키기 위해 전력을 투구했다. 리치먼드로 가는 철도가 지나가는 피터스버그가 리치먼드를 지키는 요충지였다. 로버트 리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을 여기서 맞아 오랜 기간 동안 버텼으나 결국 한계에 도달해서 1865년 4월 2일에 피터스버그를 북군에 내주고 말았다. 로버트 리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피해갔으나 4월 9일 아포마톡스에서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했다.
이에 앞선 4월 3일, 리치먼드는 그랜트의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조지아로 피난을 갔다가 5월 10일에 체포됐다. 북군이 리치먼드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링컨은 전쟁으로 파괴된 리치먼드를 방문했다. 백인들은 링컨을 차가운 표정으로 보았고 단지 흑인들만 링컨을 환영했다. 그의 곁에 있던 북군 장군이 항복한 남군의 처리 문제를 묻자 링컨은 “선처하라”고 했다. 그리고 1주일 후인 4월 14일 링컨은 암살자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은 끝이 났다.
(계속)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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