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하는 한국 군사 혁명 정부의 실권자로서의 위신을 갖추기 위하여 육군 대장으로 진급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3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11월 11일 정오 김포공항을 출발, 15일간의 장도에 올랐다.
먼저 지전 일본 수상의 초청에 응하기 위하여 이날 오후 동경에 도착한 박의장은 오후 7시 지전 수상이 베푸는 만찬회에서 비공식적으로 첫 회담을 가졌다. 이날 제1차 회담은 한 .일 양국의 집권자들과 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회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12일 오전 10시에 개최될 제2차 회담에 대비하는 예비회담이었다.
박의장과 지전 수상의 제2차 회담도 지전 수상의 관저에서 전날 1차 회담 때와 마찬가지로 개최되었다. 이날의 회담에는 한국 측에서 박 의장을 비롯 유양수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 최덕신 외무부장관, 배의환 한일회담 수석대표, 정일형 대표 및 원충연 공보실장이 참석하였으며, 일본측에서는 지전 수상, 소판 외상, 삼도조 한일회담 수석 대표, 이관 아주국장 등이 참석하였다.
이 회담에서 논의된 상세한 내용은 발표가 없었으나, 주로 재산청구권 및 평화선 관한 현안문제의 해결점과 회담의 조속 타결의 방도를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와 같은 박. 지전회담은 박의장이 방미를 계기로 한. 일 양국간에 가로놓인 모든 현안 문제들을 정치적으로 타협하여 전격적인 진행을 감행하려는 노력의 일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박의장의 방일을 전후하여 일본 신문의 사설은 일본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청구권 문제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강조하고 일본 정부에 대하여 신중한 처리를 요망하고 있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그들의 수법과 10여년간 계속하여 온 한일 회담에서 나타난 그들의 의도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우리 민족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간계를 경계하여야 할 것이며 당당한 청구권의 주장 이외에 만에 하나라도 굴욕적인 타협이 있어서는 국민의 분노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군사 혁명 후 국민의 주시 속에 급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한일 회담과 혁명 정부의 모사라고 불리워지고 있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외상과의 회담, 이번의 박. 지전 회담 등 번번한 한. 일 정부요인들의 비공식적인 접촉 및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 회담 내용을 혁명 정부의 구멍난 경제정책 등과 결부하여 궁금해진 국민들은 구구한 억측 속에 불안감조차 느끼고 있었다.
박. 지전회담이 있은 다음 저팬타임스는 11월 14일의 사설에서 “박의장과 지전 수상은 한. 일 양국간의 주요 현안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어떤 조치에 합의하였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지전 수상이 어떤 보증을 박의장에게 주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박의장은 대단히 만족하고 돌아간 것으로 알고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들간에 합의된 것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지전 수상과 일련의 구수회담을 끝낸 박의장 일행은 11월 12일 밤 10시 미국으로 향하였다.
미국 방문의 성과
11월 13일 오후, 존슨 부통령과 러스크 국무장관 등 많은 미국 관리들과 주미대사를 비롯한 교포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워싱톤 공항에 도착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간단한 환영 의식을 끝내고 미국 정부에서 마련한 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14일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될 박. 케네디 회담에 앞서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박의장은 이날 오전에 약 30분간 러스크 국무장관과 회담했으며 같은 건물 안에서 파우러 해밀톤 국제개발청장과 약 1시간에 걸쳐 회담하였다.
미국 관리들은 박의장과 해밀톤 청장의 회담이 한국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세부에까지 들어갔다고 논평하였으며, 러스크 국무장관의 회담에서는 월남 사태와 한. 일 관계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분야의 사태가 전반적으로 검토되었으나 미국의 대한 원조에 대하여서는 세부적인 토의는 없었다고 언급하였다.
전면적인 극동 정세의 검토와 함께 한국의 경제 개발 및 군사력 발전에 관한 박의장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은 예정대로 이날 정오와 오후에 개최되었다. 1차 회담은 케네디 대통령이 박의장 일행을 환영하는 오찬회에서 극히 의례적인 대담만이 진행되었으며 공식적인 회담은 이날 오후에 개최된 백악관 회담에서 진행되었다.
박의장은 1961년 8월 12일에 행한 성명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정권을 1963년 여름 민간인에게 넘겨주기로 한 혁명 정부의 엄숙한 공약을 다시 천명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가능한한 가장 조속한 시일내에 민간 정부를 회복시키겠다는 한국 정부의 의도에 특히 만족한 뜻을 표명하였다.
박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은 태평양 지역에 있어서의 외부의 무력 침략의 위협에 대한 상호 방위 문제를 토의하였으며 한. 미 양국의 군대가 한국 국토의 방위를 위하여 유엔군 사령부 예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전우라는 사실 때문에 공산 세력의 팽창에 대한 자유세계의 보루로서의 양국의 공동 이익이 강화되고 두터워졌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한국에 대하여 무력 공격이 재발할 경우 1953년 10월 1일 한. 미 양국이 조인한 상호 방위 조약에 의하여 군대 사용을 포함한 원조를 즉시, 그리고 효과적으로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결의를 재확인하였다.
그들은 만일 유엔의 원칙에 다시 도전하는 무장공격이 재개되는 경우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다시 단합되어 신속히 저항할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고 아울러 한국 전쟁에 파병한 유엔회원 국가들의 제반 선언을 상기 시켰다.
박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은 그들의 회담에 대하여 깊은 만족의 뜻을 표명하였으며 자유와 민주주의 대의에 계속 이바지하고 양국 국민의 우호적 유대를 강화할 결의를 다시금 천명하였다.
이상과 같은 박. 케네디 공동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인 15일 박의장과 맥나라마 국방장관과 고위 관리들과 회담에서 미국은 극동의 안전과 한국의 반공태세 강화를 위하여 제트기를 포함한 한국군의 무기와 장비를 현대화할 것을 약속하였다.
16일 백악관에서 한국의 경제 개발 계획에 대한 최종적인 회담을 끝으로 박의장과 케네디 대통령의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난 것이다. 이날 내쇼날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과 기자 회견을 끝낸 박의장 일행은 워싱톤을 떠나 뉴욕에서 맥아더 원수를 방문하고 1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밴플리트 장군의 환영을 받은 후 하와이를 경유 14일간의 방미 일정을 끝내고 11월 25일 11시 30분 스마트 미 제5공군 사령관의 전용기 편으로 김포 공항에 도착 무사히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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