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홍련에 딴지를 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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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홍련에 딴지를 걸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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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오해하고 있거나 내가 오해하고 있는 김지운의 그 무엇

^^^▲ <장화홍련> 스틸^^^

옴니버스 공포 영화 <쓰리>의 두 번째 이야기, <메모리즈>를 보고 형용 할 수 없는 상쾌한 공포에 휩싸인 기억이 있다. 관객들은 세 번째 이야기 진가신의 <고잉홈>에 손을 들어 줬겠지만 이야기의 범위를 서서히 실타래가 엉겨들 듯이 좁혀가는 메모리즈의 매력은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르겠다. 관객들이 왜 메모리즈를 싫어하고 <장화, 홍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지를. 혹시 객석을 메운 많은 이들은 헐리우드 리더기의 역할에 너무 충실한 것은 아닌가?

김지운의 공포영화에는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지금이 아닌) 느낌의 첨단(디지털이 아니다)이 묻어 나온다. 장화, 홍련은 메모리즈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르게 표현한다면 메모리즈는 장화, 홍련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고 여겨진다.

김지운의 공포가 사운드와 모션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작 알맹이가 빠진 공포라고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 듯한데, 아니 세상에 비주얼만으로 공포의 모두를 표현하는 영화가 존재한단 말인가? 혹시 관객들은 김지운의 그것이 더 무섭고 아기자기하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는가?

디아더스가 식스센스보다 충격이 약하다고 해서 더 그럴듯한 공포가 아니라는 많은 주장에 동의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화를 어떻게 보든 수용자의 몫이겠지만 결코 시시한 영화라든지 실망스러운 공포라는 주장에는 동의 할 수 없다.

물론 장화, 홍련은 무섭다기보다는 슬프다는 표현이 훨씬 더 적절한 영화다. 그 비극의 출발과 또한 그 비극이 완성되는 순간의 멍에와 허무는 가볍게 지나치기에는 가슴을 건조하게 만들고 건조하면서도 슬프다.

또한 후반부의 응집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에도 역시 동의 할 수 없다. 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기승전결식이나 발단에서 결말로 이어지는 방식으로 강요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어 장화, 홍련은 전혀 실험적이지 않다. 관객에게 숨기는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여주지 않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도 없다. 오히려 관객을 고려한 나머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 주려하지는 않았나 하는 우려가 있다. 실제로 인물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카메라의 앵글은 너무 많은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공포를 느끼게하는 것은 김지운의 공포에 대한 점진적인 진보다. 앞으로 더 얼마나 강렬하고 매력적인 공포영화를 양산해 낼지 아직도 젖어 있는 눈시울을 닦으며 두눈 부릅뜨고 주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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