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깃점으로 야당(한나라당)과 언론이 납북자문제를 다루면서 여론이 형성되였고 납북자 관련단체들이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국민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광의(廣義)의 이산가족 범주로 모양새
이에 정부는 적십자회담을 통해 북한이 ‘납북자는 한명도 없다’는 부인에 ‘납치여부를 따지기 보다는 가족들의 생사확인과 상봉이 송환요구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 맞는다는 소위 ’광의의 이산가족 범주‘라 하여 이산가족 상봉에 끼워넣기를 하며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이런 개념으로 적십자사의 이산가족 상봉에 납북자가족을 넣어 추진하고 있는 데 지금까지 겨우 여덟가족에 불과한 실정을 보이고 있다.
일곱차레 겨우 여덟가족 상봉으로
그 첫 번째가 제2차 이산가족상봉에 지난 87년 1월에 납북됐던 ‘동진27호’ 갑판장 강희근(49)씨와 어머니 김삼례(73)씨의 평양상봉, 강씨는 남쪽에 아들과 딸이 있었으나 재혼해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나와서 처음 납북자가족의 상봉에 언론의 관심을 끌었었다.
그는 ‘동진호 갑판장으로 일하다 공화국(북한)에 들어와 무상으로 공부하고 치료하는 곳에 영주하기로 결심했다’고 그 예의 체제선전을 했었고, 상봉후 북한매체를 이용해 ‘공화국 영해 깊히 침투해 정탐행위를 하다 단속되었다’며 ‘나는 이전부터 동경하는 공화국 북반부에 남기로 스스로 결심했다’면서 북한의 의도를 들어냈었고 노동당원에도 가입했다고 해 북한의 선전술을 펴기까지 했었다.
두 번째는 제3차상봉에서 69년 12월 대한항공기 납치사건으로 억류된 여승무원 성경희(55)씨와 어머니 이후덕(77)씨의 평양상봉, 성씨는 북한에서 대남방송 어나운서를 했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제4차상봉에서 67년에 납북됐던 ‘풍복호’선주 최원모(92)씨와 부인 김애란(79)씨였으나 남편이 상봉장에 나오지 않아 동생들만 상봉하고 돌아왔다. 최씨가 월남자(越南者)이고 남쪽의 아들이 납북자단체의 대표로 활동하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있다.
네 번째는 제5차상봉에서 68년 4월 동해상에서 납북됐던 ‘창영호’선원 정장백(56)씨와 어머니 이명복(80)씨의 금강산 상봉, 해삼을 따려 나갔다가 납북됐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제6차상봉에서 72년 12월 ‘오대양61호’의 김의준(57), 태준(49)씨 형제와 어머니 박규순(76)씨의 상봉, 맏아들 의준씨는 사망해 태준씨와 큰며느리와 손자, 작은 며느리와 손녀를 상봉했었다.
여섯 번째는 제6차상봉에서 제7차상봉에서 72년 3월 ‘오대양호’의 선원 김용철씨와 부인 강경순(75)씨였으나 김씨의 사망으로 여동생만 상봉했으며, 67년 5월 납북됐던 ‘창성호’ 선원 윤경구(55)씨와 어머니 이강삼(76)씨의 두가족이 동시에 상봉했었다.
일곱 번째는 처음 상봉자 강희근씨와 동승했던 ‘동진27호’ 기관장 김상섭(52)씨와 어머니 오말신(72)씨의 상봉이 있었다.
이산가족과 숫자대비는 무리, 정식의제로
어찌보면 납북자가족들의 상봉이 1천만 이산가족에 비해 숫자상으로 많은 점유률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여타 이산가족중에는 6.25전쟁을 통해 납북자도 있지만 월북자와 월남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훨씬 높다는 것을 계산한다면 이들은 휴전후의 강제납치로 인한 이산으로 그 개념이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어 단순대비는 무리를 가져 온다고 할 수 있겠다.
정부가 수립한 후에 남북의 체제경쟁으로 생업에 종사하던 국민을 강제로 납치한 파렴치한 행위로 당연히 월북자와 구분되어야 하며, 주권회복과 자국민 보호라는 국가의 의무와 책임의 헌법정신에 의해 북한에 당당히 주장해 정식의제(正式議題)로 별도의 생사확인과 상봉, 송환의 정책적 대안을 수립, 시행해야 하는 당위성이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2년 12월 ‘오대양62호’로 납북됐던 정도평(58)씨의 어머니 옥말근(77)씨는 납북아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뇌경색으로 지난 7월 16일 가출한 딸의 손녀만을 남겨놓고 그리던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사망한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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