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북자(拉北者)가족, 인권침해 심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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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拉北者)가족, 인권침해 심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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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철저한 ‘마이너리티’로 전략

휴전이후 480여명에 달하는 납북자 가운데 대다수가 영세한 생활을 하던 어부(漁夫)들이었을 뿐아니라 한가정의 가장들이었으며 일부 나이어린 납북자들이 포함되였었다.

이들이 생업에 종사하다 하루아침에 납북됨으로 인해 가장이나 자식을 잃은 가족들은 슬픔을 맞을 수 밖에 없었고 일부 가족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벌어졌으며, 정신이상에 시달리는 가족도 발생하였었다.

정신적,경제적 고통에 사회적 차별

특히 60~70년대 어려운 경제사정과 겹쳐 최하위층인 납북어부 가족들은 당장 생계에 지장을 받게 되어 가장을 잃은 슬픔과 경제적 고통이 계속되였고, 어린 자녀들의 학업에도 영향을 받아 이,삼중고(二三重苦)를 겪어야 했었다.

더구나 반공을 국시(國是)로 하는 박정희 군사정권과 ‘레드 컴프렉스’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로 말미암아 가족들은 천대와 괄시의 대상이 되였으며, 감시와 문초(問招)가 공공연히 자행되였었다.

더구나 ‘연좌제(連坐制)’로 인해 사회 진출에 제약을 받았으며 특히 젊은이들은 요시찰 인물로 전략되어 일거수 일투족이 경찰이나 보안기관으로부터 감시는 물론 심지어 고문까지 당하기도 하는 등의 인권침해를 받았었다.

납북자 자녀들은 사관학교 등의 진학이 원천봉쇄 당하고 각종 공무원으로의 진출도 차단되는 등 심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었다.

‘68~69년도에는 더욱 감시,제제 심해

북한은 한국의 한.일수교회담과 월남전 파병등을 빌미로 무력도발로 나서 1968년 1.21 청와대 김신조일당 기습사건(1. 21.~ 1. 29.), 미국 플레블로호 납치사건( 1. 23.), 8월의 통일혁명당 침투사건, 10~12월의 울진,삼척 공비 침투사건, 1969년 2월 주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 6월의 흑산도 간첩사건 등으로 반공(反共)체제를 강화하면서 군사정권은 더욱 더 감시와 제제를 강화해 납북어부를 심지어 ‘빨갱이’로, 그 가족들을 ‘빨갱이 가족’으로 몰아 인권침해를 단행해 고문 휴유증으로 고통받아 사망하는 가족들이 발생하기도 했었다

이 시절 언론들 마져도 심각한 인권침해에 침묵으로 일관해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이 제대로 사회에 알려지지 않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었다.

가족들의 피해 통일과정에서 풀 숙제

가장이나 자식을 북한에 강제로 납치당한 것도 서러운 데 정부로부터도 냉대와 괄시는 물론 기본권의 제약과 인권적 침해까지 받으면서 더욱 피폐한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던 납북자 가족들의 불행한 과거는 고스란히 가슴에 맺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불행한 과거는 남과 북의 체제경쟁으로 말미암아 그 피해를 고스란히 안아야 했던 우리 현대사의 산증인들이다.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까지 10여년이 넘었어도 그들은 아직까지도 국가가 져지른 피해에 대해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사과나 피해보상,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에 꿀먹은 벙어리처럼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오죽 답답했으면 팔순의 노모(老母)들이 서울의 인권위원회에서 단식농성을 하게 되였는지 모두가 깊히 새겨 보아야 할 통일과정에서 마땅히 풀어야 우리의 숙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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