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역사 산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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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역사 산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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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전쟁 (3) (1863년 7월 - 1865년 4월)

 
   
  ^^^▲ 사진은 게티스버그 전투 기념 공원에 있는 버지니아 군 기념탑. 위에 말탄 사람은 로버트 리^^^  
 

게티스버그 전투 (1863년 7월)

챈슬러빌 전투에서 승리한 로버트 리는 북부로 진격해서 북부의 주력인 포토맥 군(The Potomac Army)을 궤멸시키고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를 점거하면 워싱턴의 정치인들이 협상을 제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버트 리는 북부 버지니아 군(Army of the Northern Virginia) 70,000 명 병력을 이끌고 앤티탬 전투가 있었던 메릴랜드를 거쳐서 펜실베이니아 남쪽을 향했다. 로버트 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미시시피 빅스버그에서 남군을 포위하고 있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의 북군도 압박할 수 있다고 믿었다.

6월 9일, 제브 스튜어트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 기병대는 버지니아 컬피퍼 부근에서 북군 기병대와 조우해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북군을 북쪽으로 패퇴시켰다. 그러나 이 때 남군 기병대는 북군도 기병 전력을 갖고 있음을 처음 알았다. 6월 중순까지 북부 버지니아 군은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들어갔다. 6월 26일, 주발 얼리 장군이 이끈 남군 선봉부대는 게티스버그 마을을 점거했다. 이 때 리는 스튜어트에게 기병대를 이끌고 북군의 우익을 돌아가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게티스버그 전투시 남군의 가장 우수한 기병병력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어서 남군이 패배하는 하나의 원인이 됐다. 한편 링컨은 공격에 미온적이란 이유로 포토맥 군의 사령관이던 후커 장군을 해임하고 조지 미드 장군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7월 1일 아침, 북군의 기병대는 남군이 서쪽에서 진군해 올 것을 예상하고 고지를 장악하고 보병 본대 병력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로버트 리는 2군단장 리차드 이웰에게 “가능하면 공격하라”고 지시했는데, 이웰은 장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북군 보병부대가 고지 능선에 도착했다. 오후 2시에 남군이 공격을 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북군은 군단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도로 고지 능선으로 철수했다. 역사가들은 만일에 스톤월 잭슨이 있었더라면 아침 일찍 공격을 해서 북군 보병이 도착하기 전에 고지 능선을 장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7월 2일 전투는 남군의 공격으로 시작됐으나 남군은 북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남군 1군단장 제임스 롱스트리트 장군은 공격에 적극적이지 못해서 로버트 리의 작전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고지에선 북군과 남군은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제브 스튜어트가 지휘하는 남군의 기병대는 저녁 늦게야 게티스버그에 도착했다.

7월 3일, 로버트 리는 다시 공격을 재개할 계획이었는데, 새벽부터 북군이 동쪽에 포진한 남군 2군단 방향으로 포격을 가하면서 공격했다. 이웰이 지휘하는 남군 2군단은 북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오후 1시경 남군 1군단과 3군단은 서쪽에서 북군 주력 부대를 정면으로 공격하기 위해 치열한 포격을 가했다. 북군은 남군의 보병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하고 대응 포격을 하지 않았다. 남군은 북군의 포병대가 남군의 포격으로 궤멸된 줄 알고 정면으로 공격했는데, 그러자 북군 포병이 불을 뿜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북군 포병이 전진해 오는 남군 보병에 대해 치열하게 포격을 했지만 포탄이 고갈되어 가고 있던 남군 포병은 대응 포격을 할 수 없었다. 이날 공격에 나선 남군 피켓 장군의 보병 사단 병력의 절반이 돌아오지 못하고 현장에서 전사했다. 이 같은 피해를 무릅쓴 남군의 공격으로 북군 방어선의 일부가 잠시 붕괴됐지만 북군의 예비병력이 보충되어 남군 보병을 무수한 전우의 시체를 남겨 놓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 날에는 또한 남북 전쟁 중 가장 치열한 기병 전투가 벌어졌는데, 북군 젊은 기병장교 조지 커스터가 지휘하는 기병연대가 남군 기병대에 타격을 주었으나 궁극적으로 제브 스튜어트는 북군 기병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북군 9만 명과 남군 7만 명이 참가한 게티스버그에서 양측은 약 23,000명의 전사상자를 냈다. 총 8,000여명이 현장에서 전사해서 게티스버그에 묻어야 했고, 말 3,000마리가 죽어서 역시 현지에 묻어야 했다. 병력을 많이 잃은 로버티 리는 부상병을 추슬러서 버지니아로 철수했고, 북군 지휘관 미드 장군은 남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북군도 희생자가 많아서 더 이상 추격전을 할 수 없었다. 7월 4일에는 미시시피 빅스버그에서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의 포위공격에 저항하던 남군이 결국 항복을 했다. 이로서 남북 전쟁은 북군의 승리로 굳어지게 됐다.

전쟁 후 첫 승리를 거둔 북부는 환호했고, 남군을 추격하지 않은 미드 장군을 비난했다. 링컨은 북군 총사령관에 보다 공격적인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을 임명했다. 링컨은 그해 가을 게티스버그를 방문해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 남군 사단장으로 참가한 주발 얼리 장군은 나중에 남군의 패배에 롱스트리트 장군이 책임이 크다는 책을 썼다. 우유부단한 작전 지휘로 남군의 패배에 책임이 크다고 비난을 받은 롱스트리트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공화당원이 되어 연방정부 고위직을 지내서 ‘배신자’라는 말을 들었다.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 기병연대를 이끌고 맹활약한 조지 커스터는 남북 전쟁이 끝난 후 제7기병대를 이끌고 인디안과 전쟁을 하다가 1876년 6월 25일 몬태나 빅혼에서 인디안 연합군에 포위되어 전부대원과 함께 3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남군 기병사단을 이끌었던 제브 스튜어트는 이듬해인 1864년 5월 12일 리치먼드 근교에서 북군과 전투 중 부상당한 끝에 31세 나이로 사망했다

피터스버그 전투 (1864년 6월 - 1865년 3월)

1864년 3월, 링컨은 그랜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북군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랜트는 셔먼 장군에게 서부전선(테네시, 조지아, 미시시피 등)를 맞기고 자신은 미드 장군이 지휘하는 포토맥 군으로 사령부를 옮겨서 남부의 수도인 버지니아 리치몬드를 점령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그랜트와 로버트 리가 드디어 전장(戰場)에서 만나게 됐다.

그랜트는 버틀러 장군에게 리치컨드 동쪽을 공략하도록 하고 프란츠 시걸 장군은 세난도 밸리에서 남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버틀러의 군대는 남군과 맞서 패퇴했고, 시걸의 군대는 뉴마켓에서 북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셔먼 장군은 그해 가을에 조지아를 공략해서 애틀랜타를 점령했고, 다른 북군은 테네시를 장악했다. 이제 버지니아는 고립되고 말았다.

5월이 되자 그랜트는 미드와 함께 포토맥 군을 이끌고 버지니아 서북쪽 스포츠실베니아 지역에 들어와서 로버트 리의 남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군은 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그랜트는 남군을 계속 추격해서 동쪽으로 남군을 몰고 갔다. 그랜트는 전투에서의 인명 희생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투에서 북군이 남군보다 더 많은 전사상자를 내도 남군은 인적 자원을 보충할 수 없기 때문에 소모전(war of attrition)을 하면 북군이 승리한다고 믿었다. 이런 이유로 그랜트는 아군에 전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데 대해 개의치 않았고, 이에 따라 그에게 ‘도살자’(‘butcher')라는 별명이 붙었다. 5월 한 달 동안의 전투에서 북군은 전체 병력의 41%인 50,000명의 전사상자가 나왔고, 남군은 46%에 달하는 32,000명의 전사상자가 나왔다. 전사상자 비율은 북군이 높았지만 북군은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과 유럽에서 이민해온 이민자 등으로 구성된 보충병력을 공급받았지만 남군은 그럴 인적자원이 없었고, 더구나 조지아가 북군에 함락되어서 보급물자를 공급받지 못했다.

로버트 리는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수비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는데, 그랜트는 리치먼드 남쪽에 위치한 피터스버그를 장악하려 했다. 피터스버그는 여러 개의 철도 노선이 만나는 곳이고, 아포매톡스 강을 통해 제임스 강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6월 들어서 그랜트와 미드가 지휘하는 북군 70,000명이 로버트 리가 지휘하는 남군 36,000명을, 그리고 버틀러가 지휘하는 북군 36,000명이 리치먼드의 외곽을 지키던 남군 21,000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6월에서 7월말에 이르는 동안 북군과 남군은 참호를 파고 지루하게 공방을 계속했다.

남군의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선 피해가 많이 날 것으로 우려한 북군의 번사이드 장군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서 남군 진지 아래에서 폭발물을 터뜨릴 것을 제안했다. 번사이드는 흑인병사들을 이용해서 북군 진지부터 땅굴을 파서 남군 진지 아래에 폭발물을 부설하는 데 성공했고, 남군은 이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원래는 땅굴을 판 흑인병사들이 폭발 후에 공격을 할 예정이었으나 혹시 잘못된 경우 흑인병사들을 소모품으로 썼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순간에 레들리 장군의 백인병사들을 투입하기로 했다. 7월 30일 오전 4시 44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서 남군 약 300명이 즉사하고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이어서 북군 병사들이 진격을 했는데 이들은 30피트 깊이 분화구에 뛰어 들어가서 참호 위에 있는 북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진지 위에서 아래로 사격하는 남군에게 무차별하게 희생되고 말았다. 하루 전투에서 북군은 약 4,000명의 전사상자를 냈고 남군은 1,500명의 전사상자가 났다. 바보 같은 작전 때문에 그날은 북군에게 악몽과 같은 하루였고 번사이드 장군과 레들리 장군은 해임됐다.

1864년 9월에서 1865년 2월에 이르는 동안 남군과 북군은 피터스버그 주변에서 참호전과 기병을 이용한 기습과 방어를 되풀이 했다. 이러는 과정에서 남군은 피로가 누적됐고 병력 손실이 보충되지 못했다. 1865년 3월, 세난도 밸리를 평정한 북군의 세리던 장군의 병력이 피터스버그로 향했고, 애틀랜타를 점령한 셔먼 장군의 병력도 리치먼드로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3월 25일, 남군의 고든 장군은 포트 스트더먼에 기습공격을 가했으나 우세한 북군에 의해 실패했다. 로버트 리는 병력을 후퇴시키는 수밖에 없었고 북군은 맹렬하게 추격해 왔다. 4월 3일 새벽 피터스버그 시는 백기를 계양해서 북군에게 항복했고, 그날 저녁에 리치먼드 시도 항복했다.

4월 2일, 로버트 리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해서 노스캐롤라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남군 지휘관 조셉 존스턴 장군을 만나려고 했으나 북군 추격대에 포위되어 4월 9일 아포마톡스 법원 건물에서 웨스트포인트 14년 후배인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했다. 로터트 리는 항복을 하기 전에 깨끗한 새 군복으로 갈아입었고, 그랜트 장군은 로버트 리가 개인 무기와 애마 트레블러를 계속 소지하도록 허락했다. 남북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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