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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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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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산업혁명과 산업전사 - 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70년대에 완전고용, 수출 10억 달러 달성」이 목표라고 했다. 세부적인 공업대책은 「제철, 기계, 정유, 석유화학, 자동차공업 등 기간산업의 건설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전자공업, 도자기공업의 발전에도 힘 쓸 것이다」 즉, 박 대통령은 앞으로 전자공업과 도자기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70년대에 완전고용, 수출 10억 달러 달성

지금까지 7개년 계획을 수립해서 추진한 수출특화산업의 몇 가지 예(6개 품목)를 들었다. 7개년 계획이라면 1964년부터 1971년까지이다(註: 1971년은 제2차 5개년계획의 목표연도). 그런데 1차 5개년계획이 끝나고 제2차 5개년계획이 출발하는 1967년 벽두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공업입국에 전면작전」이란 큰 타이틀을 내세웠다.

그리고 「70년대에 완전고용, 수출 10억 달러 달성」이 목표라고 했다. 세부적인 공업대책은 「제철, 기계, 정유, 석유화학, 자동차공업 등 기간산업의 건설을 적극 추진할 것이며 전자공업, 도자기공업의 발전에도 힘 쓸 것이다」 즉, 박 대통령은 앞으로 전자공업과 도자기공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은 섬유제품의 수출이 계속 늘고 있으나 이것만 갖고는 수출신장에 한계가 있다고 보고 전자제품과 도자기 제품을 수출전략 상품화하겠다는 것이다. 상공부로서는 이 두 개의 품목에 대해 장기 육성계획을 수립·추진하게 된다.

도자기 수출

도자기 공업은 여자들의 손길이 많이 가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그래서 수출특화산업에도 포함됐다. 그러나 이 사업은 민족적 오기가 발동한 사업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도자기 원료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때는 고려청자 등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는 우수한 도자기를 생산한바 있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도공들을 대량 끌고가서 일본의 도자기 공업을 일으켰고 그 후 세계적 도자기 생산국가로 발전시켰다. 태평양전쟁 후에도 일본은 많은 양(量)의 도자기를 수출해서 전후복구에 큰 득을 보고 있었다.

한 예로, 1963년에는 식기, 타일, 고압애자(高壓碍子) 등 도자기의 총수출은 1억3천만 달러에 달한다(이중 식기류 수출은 7,097만 달러). 그런데 우리나라의 도자기 공업은 임진왜란 때 거의 폐허가 된 후 활기를 찾지 못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근대적인 도자기공업에 접할 기회가 없어 기술적으로나 기업적으로 심히 낙후된 상태로 남아있게 됐다.

그 예로 1963년에 처음으로 도자기를 수출했는데 그 액수는 불과 13만 달러. 1964년에는 100만 달러 수출 계획에 겨우 19만 8,000달러를 수출하는데 그쳤다. 일본의 수출과 비교하면 1,000분의1 수준이다.

1966년 초였다. 장관실에서 호출이 와서 올라가 보니 박충훈장관은 "오(吳) 국장! 미국대사로부터 청와대에 올라온 건의야."

대사관에서는 외국 귀빈들을 초대해서 자주 식사파티를 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의 청자나 백자 등 도자기 자랑을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진작 식탁에 나오는 식기(食器)류는 모두 일본제이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야. 그래서 대사관용 식기를 특별 제작해서 각 대사관에 보내달라는 것인데 박대통령의 특별지시야" 라고 한다.

도자기공업은 필자의 소관업무이다. 그러니 박대통령에게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朴 장관에게도 면목이 없다. 더욱이 임진왜란 때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 당하면서 일본으로 끌려간 우리조상들인 도공들과 그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우리나라의 도자기 공업을 이런 상태로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기가 발동해서 「도자기 공업의 중흥」에 대한 계획이 추진됐다. 그것이 요업(窯業)센터의 설립(안) 이었다.

 


요업센터 사업을 요약하면 우리나라의 도자기공업을 중흥시키기 위해 1)도자기연구소와 대규모의 최신식 공장을 정부자금으로 시범적으로 건설함으로써 선진 도자기기술을 국내에 흡수 정착시킨 후, 2)이 기술을 국내의 전 도자기 업계에 전수시키겠다, 3)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모든 도자기 공장을 세계수준급의 공장으로 격상시키고 나아가서 도자기의 수출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이다.


요업센터는 요업 전문연구소가 중심이 되고 이 연구소에 병설되는 최신식 도자기공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기능과 업무내용을 원안(原案)에서 발췌한다.

 

요업센터의 기능 및 업무

연구소

1) 요업전반에 걸친 국제적 선진기술정보를 종합적으로 수집하여 조속한 기간 내에 우리나라의 요업기술을 국제적 수준까지 올리기 위한 기틀을 닦는다. 이에 관하여 다음 업무를 수행한다.

(1) 도서관을 설치하여 선진국에서 발행되는 학술잡지 및 도서를 광범위하게 수집한다.
(2) 도자기의 제조과정별로 각기 국제적으로 일류기술자 및 기능자를 초청하여 국내기술자 및 기능자를 요업센터 초기의 일정기간 훈련 교육한다.
(3) 국내기술자를 해외에 파견하여 기술을 습득케 하고 선진국의 기술발전동태를 파악케 한다.

2) 우리나라의 우수한 원료를 이용하여 어떻게 하면 우수한 제품을 제조할 수 있을까하는 방안을 연구케 하고, 이것을 실제생산에 옮길 수 있는 공업화연구를 하기 위하여 다음 업무를 수행한다.

(1) 원료에 관하여는 기개발된 원료의 재비판, 원료응용의 적재, 적소, 원료의 정제 및 새로운 원료의 발전을 위주로 하여 연구한다.
(2) 도자기의 제조과정별로 각기 현재 당면하고 있는 기술적인 난점을 해결하고 나아가서 새로운 창안으로 신제품의 신조(新造)연구를 한다.
(3) 국내에서 현재 생산하지 못하고 외국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제반요업제품의 제조법을 연구한다.(예: 고압애자, 고급내화물, 염기성내화물, 페라이트, 기타)

3) 국내 요업원료를 개발 연구하여 해결된 기술적 문제점을 실제생산에 응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실험실적으로 제조연구가 성공된 품목에 대하여 공업화연구를 실시한다.

4) 병설요업공장의 품질 및 생산관리를 철저히 하여 생산원가의 감하방안을 연구하는 동시에 제조된 도자기제품의 수출을 확실히 하고 수출량의 증가를 도모하기 위하여 국제시장 조사를 정확히 하고 판매조직망을 강화하는 방안을 연구한다.

5) 요업센터 병설공장은 기술적면에 있어서 타공장에 대하여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국제적 수준의 제품을 제조하는 동시에 타공장도 지도육성하기 위하여 다음 업무를 수행한다.

(1) 병설공장내의 기술자를 세밀히 교육 훈련한다.
(2) 타공장의 기술자도 요청에 의하여 동일한 교육훈련을 한다.
(3) 타공장의 기술애로에 대하여 해결지도에 응한다.

병설요업공장

1) 국제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것으로 각기 수요국가별로 선정된 품목에 대하여 국제수준의 제품을 제조하여 전량 수출함을 목적으로 한다.

2) 기존 타공장에 대하여 기술 및 경영면에 있어서 시범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도자기공업부흥의 계기를 만든다.

3) 공장에 생긴 이윤은 제2수출도자기공장건설 또는 확장사업에 충당한다.

4) 연구소에서 개발연구되고 공업화연구가 완성된 제품에 대하여 그 유망성을 검토하여 공장을 신설한다.

▶ 연구소는 (1)기술계획부, (2)기초연구부, (3)개발연구부, (4)공업화연구부, (5)경영연구부, (6)기술교육부로 구성돼 있으며 소요건설비는 외자 100만 달러와 내자 8,620만원이다.

▶ 병설 도자기 공장은

공장대지 : 2만평

공장건평 : 1만500평

고용인원 : 1,200명

건설비 : 외자 150만 달러, 내자 3억 1,750만원

제품생산능력

a) 수출용 식기(년 15만셀), 수출용 타일, 위생도기 등 (345만 달러)(註: 1셀=97개, 12인용)
b) 국내 각 도자기 공장에 판매하는 원료: 정제원료, 조합원료, 석고형(型)틀, 전사지 등(85만 달러) --- 계 430만 달러 ---

요업센터 건설계획은 다음과 같다.

 

년차별 건설계획

1) 1966년도
(1) 대지결정 및 건설요원 구성
(2) 건축물 설계
(3) 기기 및 기계 발주
(4) 착공

2) 1967년도
(1) 연구소 완성
(2) 기술 및 기능자 모집 및 양성
(3) 외국기술 및 기능자 초청
(4) 공장완성 시운전

3) 1968년도
(1) 시장개척

4) 1969년도
(1) 시장완전 확보
(2) 확장계획 작성

요업센터 창설의 효과 및 장래성 (원안(原案)에서 발췌)

 

요업센터 창설의 효과 및 장래성

요업공업의 기술적 후진성을 조속한 시일내에 극복하고 국제적 수준에 도달시키는 동시에 기업성의 과학화를 실천하는 연구소와 공장을 가진 요업센타는 우수한 원료국인 한국의 요업공업 부흥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와같은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국한된 국내시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며 국제시장에서의 한국요업제품의 선풍적인 인기의 조성이 우선 필요한 것이므로 이 점에 대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 본 요업센터의 목적이다.

요업센터가 창설됨으로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효과 및 장래성은 다음 몇가지 항목에 대하여 고려할 수 있다.

1) 외화획득에 대하여
제1차 계획으로서 우선 요업센터에서 생산되는 400만 달러 상당의 도자기를 1969년도에는 전량 수출할 계획이며 이의 성공은 요업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뒷받침될 것이다. 일단 400만 달러 수출이 확보되면 대량 외자획득의 계기가 마련될 것이므로 1970~1980년 사이의 10개년 계획으로서 현 일본의 도자기수출액인 7천만 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2) 유휴노동력의 활용에 대해서
도자기공업은 노동자 고용율이 가장 높은 공업의 하나이므로 많은 실업자가 구제될 것이다.

3) 기존 도자기공장은 식기류 및 타일을 합쳐서 수출액이 겨우 19만 달러 정도일 뿐 거의 전적으로 국내시장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기술적인 애로 및 품질생산관리의 불능 등으로 수출에 있어서 그 수지관계에 상당한 난점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수출전문의 요업센터의 창설은 경제면에 있어서 이들 기존 도자기공장에 하등의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요업센터의 창설로서 이루어질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시범적인 공장 경영방법은 기존공장에 대하여 자극을 주어 이들의 발전을 면치 못하게 할 것이며 또한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기술 및 경영상의 지도육성을 요업센터가 할 것이므로 기존공장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할 것이라 기대된다.

4) 국내외 유능기술자의 활용도에 대해서 현재 국내에는 상당수의 유능한 기술자가 있으나 연구시설의 빈약 및 기차 이유로서 그 활용도가 불충분하다. 또한 해외에도 상당수의 유능한 한국인기술자가 있으나 국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적당한 장소를 발견 못하여 개국 못하고 있다. 요업센터는 이와같은 내외의 유능기술자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5) 병설공장에서의 생산품종은 국제시장에서 인기품목으로 선정된 것 이외에 현재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서 가급적으로 현존공장에 장해가 되지 않는 제품(연자기, 내장타일, 위생도기, 수출용완구 등)을 제조한다.

6) 장래계획으로서 원료공장, 석제공장(제4비료공장에서의 부 산업을 이용) 내화갑공장 및 요업용철형(die) 제조 등을 계획한다.

이 요업센터는 민간 도자기업계가 영세하기 때문에 정부에서 시범적으로 건설을 했는데, 박대통령은 초대사장으로 21대 상공장관인 이병호씨를 임명했다. 그러나 전망이 밝다고 보았는지 건설이 되자마자 도자기 대량소비자였던 대림(大林)산업이 뛰어들어 불하를 맡았다. 현재의 대림요업이다.

이 요업센터는 국내의 도자기업계의 기술과 기업성을 국제수준으로 격상시킨다는 당초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요업센터의 시범공장이 완성되자 구내의 도자기업계에서는 서로 경쟁적으로 기술을 향상하고 새로운 기계설비를 도입했다. 그 결과가 현재의 우리나라 도자기공업의 당당한 위상이다. 이 계획을 수립 추진했던 필자로서는 임진왜란 때 억울하게 끌려간 도공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렸다고 자위한다.

전자제품 수출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과학기술자나 학자가 공업육성에 대한 용역(用役) 업무를 위탁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교수나 과학자는 행정가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용역보고서를 ―테크노크라트의 검토 과정을 배제한 채― 고위 행정가들이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에 옮길 때는 차질이 나기 쉽다. 과학기술자와 테크노크라트의 차이점이 이런 점에 있다. 전자공업 육성문제의 예를 들어 이러한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朴 대통령은 수출을 획기적으로 증대하기 위해서는 섬유공업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럴 때에 일본과 대만에서는 전자공업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으며 수출액도 크다는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듣게 됐다.

1967년 9월 콜롬비아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담당하던 김완희(金玩熙) 교수가 귀국하여 한국의 전자공업을 시찰하고 난 후 朴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했다. 그 골자는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육성에 주력하면 1971년에 1억 달러를 수출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67년의 전자제품 수출액은 고작 655만 달러였고 ― 이 해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은 3억 2천만 달러였으니― 전자제품의 수출이 총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2%에 지나지 않을 때이다. 그러니 朴 대통령으로서는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고, 이 자리에서 김완희 교수에게 본격적인 조사연구를 의뢰했다.

김완희 교수는 조사연구를 끝내고 68년 8월 초 朴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는데 '1971년에 1억 달러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한국전자산업진흥원」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건의의 요지였다.

이 진흥원에서는 전자공업개발 5개년계획 작성, 품질관리, 검사 및 시험, 기술자 훈련,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 외국시장 조사, TV 브라운공장 건설 및 운영, 교육TV 방송국 소유 및 운영 등을 담당하겠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상공부에서 검토 후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은 당시 기획관리실장이었던 필자를 불러 상의를 했다. 이 때 필자는 "金 교수의 안은「한국전자산업진흥원」을 새로 설립해서 전자산업 진흥에 관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겠다는 것인데, 심지어 전자공업육성 5개년 계획 작성까지 자기들이 작성하겠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상공부는 능력부족이니 손을 떼라는 뜻이다. 그러나 전자공업은 상공부 고유의 업무이다. 그러니 상공부가 모든 책임을 지고 추진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다. 품질관리, 시험, 검사 등은 상공부 산하 국립공업연구소 및 한국정밀기기센터에서 실시하면 된다. 연구업무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활용하면 해결 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김 장관은 이 안대로 朴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하마터면 전자공업 육성에 관해서는 정부 내에 중복기구가 탄생돼서 큰 혼선을 빚을 뻔한 사건이었다.

상공부의 전자공업 육성계획

그런데 약 9개월 후인 1969년 6월 초, 朴 대통령은 - 그간의 진척상황을 체크하고자 했는지- 전자공업 육성방안에 대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정렴 장관은 직감적으로 이 보고의 중요성에 대해서 어떤 예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때 상공부의 전자공업 담당 국장과 과장 모두가 기술자 출신 즉, 테크노크라트가 아닌 순행정가였다. 더욱이 새로 취임했기 때문에 전자공업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파악이 안된 상태라고 생각했던지 金 장관은 당시 기획관리실장이었던 필자에게 "이번 전자공업 육성보고는 잘 되어야지, 잘못하면 상공부 전체가 기합감인데 吳 실장이 수고를 해주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내 소관업무는 아니었지만 브리핑 자료를 작성하게 됐다. 필자는 전자공업 육성에서 전자기기(라디오, TV 등 완성품)와 전자부품 양쪽을 모두 수출 상품화하기로 했다. 전자공업의 수출전환 즉, 피라미드형 CEOI 전략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는 엔지니어링 어프로치 기법을 활용키로 하고, 특히 「임팩트 폴리시」(Impact Policy)「목돈작전」을 쓰기로 했다.

우선 계획기간을 8년으로 잡았다. 1971년까지를 제1단계(3개년) 계획, 나머지를 제2단계(5개년) 계획으로 구분했다. 1단계인 3개년계획에서는 71년에 ―김완희 박사가 제시한― 1억 달러 수출, 제2단계인 5개년계획에서는 76년에 4억 달러 수출을 목표로 정했다. 전자부문의 수출을 68년의 1,944만 달러에서 76년에 4억 달러로 8개년 계획기간 중(실질적으로는 7년 반)에 20배로 늘리자는 안이었다.

「임팩트 폴리시」(Impact Policy)와 「목돈작전」

여기에 「임팩트 폴리시」를 적용했다.

이미 설명한대로 모든 품목을 느슨하게 도와주면 안되고, 개발품목을 엄격히 선정해 놓고 이들 품목에 대해서 집중지원을 한다는 전략이다. 그래서 제1단계인 3개년계획에 62개 품목을 선정하였다. 가장 손쉽게 수출 상품화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제2단계인 5개년 기간에는 33개 품목을 추가하여 총 95개 품목을 선정했다. 이것을 제품 성격별로 구분하면, 전자기기가 54개 품목, 전자부품이 29개 품목, 전자재료가 12개 품목으로 총 95개 품목이었다. 이처럼 명확한 수치 목표를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엔지니어링 어프로치의 출발점이 된다.

또한 임팩트 폴리시라는 것은 업자를 먼저 선정하는 것이 아니다. 품목부터 설정해 놓은 다음 이를 담당할 적격업체를 정하는 것이다. 특히 개발 초기에는 국내에서 아직 생산 안되는 것도 있으니, 이럴 때는 정부에서 업자를 선정해서 개발토록 유도해 나가야 한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은 아직은 유치단계였다. 따라서 연구개발, 양산체제 확립, 생산합리화 등의 과제가 있었다. 연구개발은 개발 대상품에 대해 개발 담당자를 지정하고, 개발목표 연도를 정해 놓고 시작해야 한다.

연구개발에 있어 이러한 목표가 뚜렷하지 않으면 시간만 질질 끄는 것이 연구소의 습성이다. 새로운 물건을 발명하라는 것도 아니다. 외국에서 이미 생산되고 있는 물건을 국내에서 모방·생산하는 기술을 연구하라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외국에도 가보고 견본을 분해해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개발비는 정부에서 필요한 만큼 보조하겠으니 자신 있는 사람이 책임지고 하라는 것이다.

양산체제의 확립에 있어서는 대상품목별로 업체를 정해 놓아야 한다. 한 품종에 한 업체일 수도 있고 여러 업체일 수도 있다. 기술은 외국에서 도입해도 좋고 자체 해결해도 좋다. 연구소의 협조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각 담당업체는 어느 해(목표년도)에 얼마(생산량, 수출액)를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해야 하고 이 목표달성에 책임져야 한다.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자금은 정부에서 지원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품목별로 누구든지 성능이나 품질을 개선하거나, 생산비 절감 방안이나 기타 합리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개선해서 책임지고 실시하겠다면,「생산합리화자금」도 융자해 주기로 했다.

종합해서 설명하면, 정부에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업자는(연구기관 포함) 전자제품을 개발하고 공장을 짓고 좋은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 수출하라는 정책이었다. 제조업체용으로 124억 원, 연구 및 진흥기관에 16억 원, 총 140억 원을 투입하겠다는 안이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는데, 앞으로 8개년에 걸쳐 소요되는 자금을 미리 확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것이 「목돈작전」의 개념인데 정부지원 자금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꾸미는 것은 전쟁에서 탄약 준비 없이 전쟁을 시작하는 것과 같아 실패하기 일쑤라는 것을 과거의 경험에서 이미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註: 대통령에게 브리핑할 때, 결재를 받아 놓지 않으면 예산당국에서 깎아 버리기 일쑤이다. 그러니 대통령 재가를 맡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대통령 재가는 목돈작전의 필수 요소이다).

이상이 브리핑 자료의 골자였다. 그 외에 전자공업의 단지화(團地化)계획도 세웠다. 기왕에 전자공장을 새로 짓게 되는 것이라면, 한 단지에 위치하는 것이 부품공장이나 조립공장 간에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이점(利點)도 있다고 본 것이다.

기타 계열화 문제, 산학협동 문제, 전자공업협동조합 육성 문제도 포함되었다. 특히 외국기업의 적극 유치 문제가 많이 다루어졌다. 외국기업체의 100% 투자, 기술료 지불문제 등에 있어 정부의 까다로운 절차를 대폭 개선해야 했기 때문이다.

4억 달러 수출 목표를 명시한 전자공업 육성방안 브리핑

브리핑 준비는 완성되었다.

김정렴 상공장관은 이 보고를 다 듣고 나서 만족했는지 "吳 실장, 청와대 브리핑도 당신이 수고하소"라고 했다. 결국 「청와대 브리핑」까지 대타로 나서게 됐다. 브리핑 장소는 청와대 별관 2층 회의실이었다.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이하 각 장관도 배석했다. 브리핑은 좀 긴장된 분위기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장은 "1976년에 4억 달러를 수출하겠습니다"가 전부였다. 자신있게 말해야 한다. 브리핑 첫마디에서 긴장감을 주어야 다음이 수월해진다.

필자는 그때까지 꽤 많은 브리핑을 해서 요령이 생겼을 때였다. 특히 朴 대통령에 대한 브리핑에는 요점이 탁탁 나와야 한다.

요점이란 군대식 6하원칙(六何原則)이다. 우선 목표가 뚜렷해야 한다. 이 대목이 朴 대통령 마음에 들어야 한다. 6하원칙의 Why이다.「무슨 목적의 브리핑이냐」를 꼭 숫자로 표시해야 한다. 어설픈 구호(口號) 가지고는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4억 달러 수출계획」이란 문구가 꼭 필요했던 것이다. 1억 달러 수출계획이라면 이미 김완희 박사가 써먹었으니 김빠진 맥주와 같아진다.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개발품목 일람표이다.
여기서 What이 나온다. 이 때부터가 브리핑의 본론이 된다. 필자는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황무지와 같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라디오나 TV를 수출한다고 하는데 적자 수출입니다. TV 한 대 수출해서 40달러를 받습니다. 그런데 TV 한 대를 만드는데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원자재와 부품값이 36달러, 즉 90%나 차지합니다.

TV 한 대를 수출할 때 우리나라에 떨어지는 외화가득액은 단돈 4달러입니다. 이 4달러에서 여공에게 주는 인건비, 땜질하는 데 필요한 재료 등 각종 재료비, 전기값, 공장관리비, 포장값, 그리고 내국 수송비, 선적비, 보험료, 기타 등등을 모두 지불하게 됩니다. 그러니 적자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註: 기술소득제도 등 적자보상책에 대해서는 拙著, 「한국형 경제건설」1권 pp.230~232 참조).

값을 단돈 2달러라도 올려 받으면 외화가득액은 ― 4$에서 6$로 돼서- 50%나 증가하게 되는데, 다른 나라와의 경쟁 때문에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트랜지스터나 IC가 수출되고 있으나 외국회사에서 모든 자재를 들여다가 여공들이 가공만 해서 그 회사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이들 외국회사들은 100% 단독 투자를 한 회사들입니다. 그러니 트랜지스터나 IC를 미국에 있는 모(母)회사에 가지고 간 후 값을 얼마를 받든 우리나라와는 상관할 바가 못됩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여공들의 임금만 챙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임금만이 외화가득액이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은 아직까지는 여공들의 인건비만 챙기는 업종입니다."

여기까지 설명하고 필자는 朴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눈치를 살펴야 한다. 朴 대통령은 확실히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았다.

필자는 마음속에 준비는 끝났다고 느끼고 가장 중요한 설명 대목인 "How"의 문제로 들어갔다.

필자는 브리핑 차트에 나와있는 전자부품일람표와 이들 품목들의 수출계획표를 가르키면서 "각하! 여기에 나와있는 스피커의 예를 들겠습니다. 이 스피커는 지금까지 모두 수입해서 써왔는데 최근에 스피커공장이 새로 건설됐습니다. 이 공장에 물어보니 최신 시설을 갖추게 하고 생산량만 많아진다면 생산비를 현재 수입하는 값의 50%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합니다.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기술도 차차 높아지고 있으므로 품질 면에서도 외국 제품과 경쟁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부품 하나 하나를 국산화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부품의 국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외국의 부품업계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받고 재미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으로 해결방법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었다.

 


"이 그림은 금년(1969년)부터 1971년까지 집중 개발해야 할 부품 및 제품의 목록입니다. 당장 시급한 품목 62개를 골랐습니다. 즉 전략상품입니다. 이 품목을 개발하고 공장을 짓고 수출하겠다는 기업가가 신청을 해오면 엄선해서 수출업체로 지정,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좋은 물건을 값싸게 만들어 수출하겠다는 업체를 주축으로 해서 전자공업을 육성해 나가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의 기반이 구축되고 수출경쟁력이 생기게 되겠습니다."


대충 이런 식의 브리핑이었다. 여기서 What은 품목, Who는 공장을 짓고 수출하겠다는 업체, When은 1969~71년의 3개년 계획과 1972~76년의 5개년 계획을 합해서 8개년계획 기간 내가 된다, 이렇게 Why, How, What, Who, When 까지가 설명된 것이다.

Where는 전자공업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된다. 공장입지에 큰 제약이 없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다만 전자공업단지가 필요하다는 점과 가능하면 자유무역지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만 제시했다. 앞으로 생기게 되는 구미 전자공단과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발상이 여기서 나온다. 기타 여러 가지 상세한 설명이 계속되었다.

朴 대통령, "상공부 안(案)대로 추진하시오."

이제 마지막 장면이다.

이 때가 중요하다. '작전계획이 나왔으니 재가를 해 주십시오'라는 대목이다. "이 안을 실시하자면 막대한 자금(資金)이 소요됩니다"라는 조건이 오게 된다.

朴 대통령은 총사령관 다웠다. 자금 소요계획을 보더니 "金 부총리, 낼 수 있소?" 한다. 이 말은 朴 대통령 자신은 이미 결심을 했으니 부총리보고 조치하라는 명령과 같다. 김학렬 부총리는 "예, 상공부 안(案)대로 조치하겠습니다"하고 답했다. 朴 대통령은 "그럼 상공부 안(案)대로 추진하시오"하고 결정을 내렸다. 작전명령 하달이다. 그리고 8년간에 쓰여질 140억 원이라는 목돈(資金)이 마련된 것이다.
(註: 브리핑은 2시간이나 소요되었다. 브리핑을 끝내고 난 후 朴 대통령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담배를 한 대 피우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몹시 부드러워졌다. 그리고는 전자공업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필자는 이 때 개발코자 하는 전자부품의 실물을 가지고 갔었다. 큰 베니어판에 이들 부분품을 매달아 놓고 이름을 붙여 놓았다. 朴 대통령은 김학렬 부총리에게 "전에 임자가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일 때 콘덴서가 무엇인지 물어보니 모른다고 하더구만. 저기 베니어판에 축전기(蓄電器)라고 써놓은 것이 바로 콘덴서야"라며 웃었다).

그 날의 브리핑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은 비약적인 도약을 했다. 그 날의 브리핑 때 1976년의 전자제품 수출목표를 4억 달러로 정했는데, 실제로는 10억 3,600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무려 260%의 달성율을 기록한 것이다.

이해 우리나라의 총수출액은 77억 1,500만 달러였으니 전자제품이 점하는 비율은 17.6%에 달했다(註: 1997년 현재 반도체 수출액은 174억 달러(세계 3위), 반도체 제외 전자제품 수출액은 252억 달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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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2006-08-20 23:01:25
지금 충분히 먹는 밥도 귀찮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깨끗한 물과 공기가 항상 충분히 우리 곁에 있어왔는데
그 물과 공기가 어쨋다는 거냐?라는 되물음을 듣는 것과 같지요.
자유를 잃고 북한의 요덕수용소에서 자유를 갈구한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한국국민들의 많은 비율이
그처럼 중요한 것들의 가치를 모르는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멍청이란 뜻이지요. 진정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것들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나간 고통의
역사를 다시 경험하게 된다는 말이 한국민들에게
적용되리라 생각하니 넘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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