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백(望百)을 바라보는 94세의 이희호 여사가 3박 4일간 북한을 다녀왔다. 정치권에서는 일단 환영성명을 냈지만 그것은 대국민 립서비스 차원의 레토릭일 뿐, 국민의 느낌은 정치권과는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국민의 시선은 이번 이의호 여사의 방북이 김정은의 친서초청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김정은이 과연 이희호 여사를 만나줄 것이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희호 여사는 “북한에 온 걸 환영한다”는 극히 의례적이자 형식적인 김정은의 인사말을 간접적으로 들었을 뿐, 김정은은 끝내 나타나지도 않았고 만나주지도 않았다.
특히 초청의 주최 측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평통위원장 김양건 노동당 대남 비서조차도 나타나지 않아 이희호 여사의 북한 방문은 단순 관광 이상 차원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지난 5일, 새민련 박지원 의원은 모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의호 여사의 북한 방문길에 자신과 임동원, 권노갑, 김옥두 등이 동행하겠다고 신청한데 대해 정부가 방북을 불허하자 유감을 표명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지금쯤 박지원은 안 가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박지원 일행이 이희호 여사의 일행과 함께 동행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고사하고 김양건 조차도 만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가정하면 박지원의 체면은 그야말로 구겨질 데로 구겨졌을 테니까 말이다.
당초 이희호 여사가 방북을 하겠다고 나선 것은 북한에 가서 김정은을 만나거나 아니면 최소한 김정은을 대리한 김양건 노동당 비서 정도는 만나 6.15 정신운운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것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희호 여사 일행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조평통 김양건은 그림자도 비춰지지 않았고 기껏해야 대남 실무를 총괄하는 맹경일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방북단을 영접하고 만찬도 함께 했을 뿐이었으니 스타일이 엉망으로 구겨진 셈이었다. 이런 걸 보면 역시 기대가 커면 실망도 커다는 말이 실감난다.
하지만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방북 전부터 얼마든지 예상되는 일이기도 했다. 이희호 여사는 일개 민간인 신분에 불과하므로 정부에서는 처음부터 그 어떤 임무를 부여해 줄 수가 없는 한계가 있었다. 설령 정부가 특사 임무를 부여해 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부인에 불과한 94세의 이희호 여사에게 모종의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은 남한의 정치판을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김정은이 권력과 거리가 먼 민간인 신분의 이희호 일행을 만나봤자 단 한 푼어치의 이득도 없다고 판단했을 터이므로 김정은이나 김양건 등이 만나줄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어쩌면 김양건이 만나려고 해도 김정은이 만나지 못하게 지시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이희호 여사 일행이 거의 빈손으로 돌아오자 좌파성향 전문가들은 김정은과 김양건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6.15 공동선언 주역들이 빠졌고, 남북관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 방북단에 많이 포함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번 방북을 이희호 '개인 자격' 차원에 한정시키며 별다른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정부에 화살을 돌리고 있지만 이와 같은 변병은 북한 정권의 속성을 모르는 구차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 소리다.
아시다시피 북한 정권은 매우 호전적이기도 하지만 비겁하고 영악하기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6.15 선언 당시의 주역들은 이미 권력에서 퇴진했거나 변방으로 물러난 상태에 있다. 또한 그들은 이미 정계를 은퇴했거나 재야에 속해있다. 정권적 차원에서 결정권이 전혀 없는 과거 6.15 선언 주역들이 방북을 했다고 해도 김정은이나 김양건 비서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을 계산기에 의존하는 북한 정권이 일전 한 푼도 나올 것이 없는 빈껍데기 6.15 선언 주역들이 온다고 해서 무슨 정치적 이득이 있다고 애써 만나주었겠는가, 또한 남북관계 베테랑이 동행하지 않았다는 말도 사리에 어긋나는 지적이다. 현 정권에도 남북관계 베테랑들이 즐비하다는 점에서 이 말도 틀렸다.
어떤 얼치기 전문가는 "이희호 여사에게 당국 차원에서 메시지를 주고 무게를 실어주었으면 결과가 다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북한대학교대학원의 양 모 교수라는 작자는 "정부가 이희호 여사의 방북을 다소 소극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둘러댔지만 이 말도 현실을 도외시한 지적이다.
비판을 하려면 무례를 저지른 김정은을 비판해야지 왜 우리 정부를 비판하는가, 어느 나라 정부가 100세를 바라보는 전직 영부인에게 메시지를 부여한 사실이 있는가, 또한 어느 나라에서 퇴임한 대통령의 부인이 적성 국가를 방문하지 못해 호들갑을 뜬 일이 있었는가, 이런 발상을 가진 자가 전문가라고 자처하고 있느니 넌센스가 따로 없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북한 당국과 대화 할 필요성이 있으면 정권차원에서 밀사도 보낼 수가 있을 것이고 특사도 보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응하지 않는다면 이런 방법도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 대북한 외교의 특성이다.
이희호 여사는 이번 방북에서 재미교포 종북 나팔수 신은미 보다도 결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이희호 여사의 방북을 계기로 세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북한에서 거창한 환대를 받기 위해서는 북한을 찬양하는 골수 종북추종자 행세를 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돈 보따리에 버금가는 선물을 듬뿍 안겨주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라도 이희호 여사 일행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북한 김정은 정권이 확실하게 보여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방북결과를 보면 결국 남은 것은 ‘100세를 눈앞에 둔 고령의 나이에 그런 대접을 받기 위해 북한에 갔었는가’ 하는 싸늘하고 냉정한 시선밖에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이 다수 국민의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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