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10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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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한국인의 10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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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 시각과 깊은 지식으로 이해해야

 
   
  ▲ 동북아우의연맹(FAFA)의 강연행사 장면
FAFA는 "이기는 것보다 친구가 되자"는 주제로 양국 간 우호행사들을 전개했다.
 
 

우선 나는 한국인으로서 같은 한국인들이 가진 중국에 대한 오해에 관하여 해명할 자격이 충분치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나름대로 중국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오해들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대부분이 부지런한 한국 언론들 덕분에 중국을 너무 속속들이 시시콜콜하게 접함으로써 생겨난 ‘코끼리 만지기’의 오류에 기인한다.

자, 매일매일 정신없이 쏟아지는 뉴스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또는 어떤 지식인의 주관적가치기준에 따라 쓰여진 “너무 좋거나, 너무 나쁜” 그런 중국 소개 책을 통해서도 아니라, 마치 대학에서 중국학 개론을 배우듯 중국의 체제에 대한 기본지식과 중국 법률, 그리고 기본적인 중국경험들을 토대로 합리적인 분석을 하였더라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심각한 오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따라서 우리는 접근방법에서부터 중국을 거꾸로 이해했다. 정신없이 뉴스를 읽다 보니 중국에 대한 엄청난 문제와 모순과 심각한 사실들을 먼저 알게 되고 다음엔 비판적인 중국 소개 서적들을 읽게 된다. 그리고 정작 중국에 관한 기초 데이터들을 접할 때는 “뭐 이런 자료야 상식이거니” 하고 넘겨 버린다.

현재 한국에서 출간된 중국 관련 서적들 중 긍정적인 가치관에 기초한 책들은 적지만 그나마 “누가 뭐라 하든, 중국은 발전 비전이 있는 나라다”는 겉핥기 정도다. 일종의 비즈니스 서적들이 주를 이룬다. 그렇지 않고 중국을 객관적으로 쓴 책들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왜? 이미 관심들은 다른 곳에서 불필요할 정도로 세세한 부위에 몰두하고 있으니까. 즉, 우리는 중국인들도 모르고 있는 중국의 작고작은 문제점들까지 무슨 전문적 지식인 양 자랑거리로 삼는다.

그래서 우리가 만져 본 코끼리의 다리는 어떤 느낌인가?
“많이 거칠고, 엄청나게 억센 듯하고, 그리고 지저분해 보인다”

대체로 틀리지는 않은 이 느낌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이러한 느낌들의 합계가 코끼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논리철학자들에 의해 논증되었다. 만약 이 질문을 중국 전문가들에게 던진다면 어떤 답이 나올 지 궁금하다. 아마도 “아직은 좀 더 지켜 볼 만한 가변적인 나라가 중국”이라 답할 개연성이 가장 크다. 그것이 바로 코끼리 만지기에 의해 생겨난 오류, 그래서 코끼리는 보아 구렁이(생떽쥐뻬리의 ‘어린왕자’) 속에 들어가고 우리는 ‘모자’를 생각하게 된 건 아닌가?

한국인들의 인식속에 있는 중국에 대한 오해들을 한 가지 씩 들어 보자.

1.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로 나아가는 중이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중국식 자본주의’라고 한다. 궁색할 때 이렇게 말해도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역시 진실은 아니다.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주의 국가이며, 단지 경제개방이라는 경로를 선택하여 ‘돌아가는 지름길’을 바쁘게 가는 중이다. 아직 마오저둥의 동상들이 각 도시마다 건재하지만 개방의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덩샤오핑에 대한 평가는 유보 중이다.

최근엔 토지 사유화의 전개과정에서 다시 집체방식의 농업단위(농업전업합작사)를 집중 재건하는 중이다. 계획경제의 영도 아래 국영기업과 자치단체들의 권한 및 이익을 최우선 경제목표로 하고 있다. 세금폭탄을 때려서라도 부동산도 억제하고 농촌과 서민경제를 살리려 한다. 왜, 중국은 그 갑갑했던 구 사회주의 체제로의 회귀를 생각하는 것인가? 그건 우리 생각일 뿐이다. 중국 내에서는 그런 의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답은 간단하다.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강한 사회주의’,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 중국인들은 불친절하다?

맞는 얘기다. 가끔 친절한 중국인들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친절이 아니라 ‘화기애애’한 상황일 뿐, 일방적인 배려나 서비스적인 의미는 아니다. 중국인들은 복무원이든 손님이든, 아니면 공무원이든 민원인이든, 원칙적으로 다 평등하다고 여긴다. 여기서 친절이나 서비스가 끼어들 틈은 없다. 아니 필요치가 않다.

‘복무’라는 것은 단지 ‘일(임무)에 대해 정해진 규칙대로 응대한다’는 의미이지, 영어로 ‘Service’와 같은 의미는 아니다. 어떤 이유로든 누군가가 누군가에 대해 불편한 태도를 취할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평등 속에서 서로가 편한 것이 좋다는 의미다. 너무 중국적으로 해석하는 거라 보아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살다가 가끔 인천공항에 내려 택시나 공항버스를 탈 때 기사가 건네는 껌 한 자루나 캐리어를 들어주는 친절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3. 중국은 힘과 속도로 밀어부친다?

이 점 역시 전면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염두에 둘 것은 여전히 중국이 자국 내에서나 국제사회에서 전혀 새로운 상황과의 연속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중국 자체로는 최선의 선택을 해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외부(국제사회)의 비판과 간섭이 가해진다면 언제든지 중국은 거칠어질 것이다. 다분히 중국적인 방식으로 ‘완곡하고 부드럽게’ 요구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리라 본다.

너무 빨리 강대국으로 올라선 중국에 대해 주변국들은 큰 부담을 느낀 나머지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비판과 간섭의 지렛대로 중국을 움직여 보려 하는 것은 아닌가?

4. 중국인들은 모두 가난하다?

여기에도 ‘사실’과 ‘모순’이 함께 있다. 간단히 “부자도 많고, 가난한 사람은 더 많다”고 정의하면 정답이다.

그런데 왜 중국여행 가면 부자는 안 보이고 전부 가난한 사람만 보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곤 한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난한 것이 맞고 승용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다 부자이니, 당연히 얼굴 본 사람들은 가난해 보일 수 밖에. 그럼, 또 이렇게 묻는다. 호텔이나 백화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부자란, 양복 앞 단추가 몇 개 짜리여야 하고, 구두는 어떤 걸 신고, 반드시 느리게 걸어야 하는 건데, 그들은 그게 아니더라고 말이다. 내가 아는 중국의 큰 부자들은 손님을 만날 때도 청바지에 라운드-티셔츠를 입고 나온다고 해도 “세상에 그런 부자가 있는가?”면서 전혀 믿으려는 기색이 없다.

5. 중국인들은 먹는 데 돈을 다 쓴다?

부분적으로 맞다. 부자는 부자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서 먹는 것을 중시한다. 그러나 중국에 살아 보지 않고 과연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한국인은 드물다. 월급이 20배, 수입은 수 백 배가 차이나도 중국인들의 식생활은 나름대로 풍요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다만 음식의 질과 빈도에서 차이 날 뿐이다.

우선 중국에는 주식이 밥과 국수, 만두, 빵 등 다양하다. 기초반찬이 있긴 하나 대체로 요리를 중시한다. 요리 종류가 워낙 많고 가격이 다양하다. 게다가 쌀 한 가지만 놓고 봐도 가격이 5Kg 당 8위엔(약 1,400원)에서 90위엔(1만7천원)까지 있다. 다른 식품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국 교민들 역시 중국에서 생활비를 예측해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매일 입맛이 다르다 보니.

6.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싫어한다, 또는 좋아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하기 나름이다’, 그리고 ‘중국인 역시 사람 나름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느 쪽으로든 미리 고정관념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조금 성급한 생각에 변별해서 정의한다면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고, 한국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떤 이는 “한국 드라마와 가요만 좋아하고 나머지는 다 싫다고 한다” 따라서 “좋다” 한다고 우쭐할 필요도 없고 “나쁘다” 한다고 경계할 건 없다. 왜냐하면 중국인과 마주 서 있는 자신이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니까.

7. 중국은 불량식품과 짝퉁 천국이다?

역시 맞는 말이다. 만약 당신이 중국에 여행을 가거나 중국에서 자녀를 키우고 있다면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식품이나 가구 등을 고를 때 기준이 필요하다. 식품은 성분과 포장을 보고 고르라. 가구나 물건을 볼 때는 반드시 가장 단순하고 튼튼한 걸 고르라.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예민하고 중국인들은 그리 심각해 하지 않는다. 당장 AS를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와 달리 중국인들은 스스로 고쳐서 쓴다. 우리가 철저히 서비스의 수혜자이기를 바란다면 그들은 제조원의 협업자인 지도 모른다.

8. 중국은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나라다?

아마도 누구나 생각해 봄직한 이 주제는 1990년대 초 미국식 중국 이해에 기초를 둔다. 여기에는 체제의 차이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개입되어 있다. 지니계수가 0.48에 이르면 어떻다는 말이 많지만, 지금 중국에서 통하는 이론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마치 우리집에서는 매일 육식을 먹는데 옆집에 갔더니 야채만 먹고 있어 영양실조가 걱정된다는 이치와 비슷하다. 체질이 다른 사람끼리 반찬을 비교하는 셈이다. 지금처럼 계속해서 경제가 나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빈부격차가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대문에 중국은 8% 이상의 고도성장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지 않은가?

더욱 중요한 사실은 티베트나 위구르 사태 등과 같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접근방식에서 우리와 중국은 전혀 다르다. 최근 들어 미국은 이 점을 다소 이해하기 시작했으나, 같은 문화권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여전히 몰이해에 빠져 있다.

중국의 개방화를 자본주의화로 오해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시민사회 형성으로 중국이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이 시민사회로 갈 개연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내부형세에 따라 정책적으로 아주 느리게 갈 것이 확실하고, 우리 눈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오히려 특유의 자신감에 의해 집체사회로 회귀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9. 중국은 곧 선진국이 된다?

이 역시 몰이해의 소치다. ‘선진국’이라는 말을 ‘경제대국’으로 바꾸면 성립된다. 아마도 중국 정부, 또는 중국의 상류층은 이미 선진국을 능가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췄다. 그러나 13억명이라는 엄청난 인구와 넓은 영토가 지속적인 국가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즉, 분배도 어렵지만 균형적 국토개발과 유지관리, 재해대응도 어려운 과제다. 더욱 국가 평균수준의 상승을 가로막는 요인은 바로 교육이다. 교육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매개체이자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중국어’의 문제다. 문맹률을 극복하는 것이 경제발전보다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10. 중국인들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중국을 직접 겪어 본 수많은 한국인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특히 이해관계 앞에서 잘 내색하지 않는 왕서방에 비유되곤 한다. 대륙적 기질과 전체주의 사회환경의 특수성으로 이 점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왕서방’에 대한 한국인들의 생각은 부분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중국인들이 입장표현에 인색한 것은 ‘기다리는 만만디 기질’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무작정 ‘때’가 아니라 ‘국면의 변화’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쉽게 비유하면 중국인들이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면, 4거리에 닿은 운전자처럼 ‘신호’를 기다리는 셈이다. 누가 봐도 좌회전을 해야 할 상황이지만 명분과 조건이 맞지 않으면 중국인들은 마냥 지켜만 보면서 직진이나 우회전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처음부터 좌회전 신호가 보였다면 그들은 사정없이 엑셀레이터를 밟아 4거리를 통과했을 것이다. 몇 가지 경우에 따라 나타나는 그 태도의 차이를 잘 이해한다면 중국인과의 비즈니스나 교류에 큰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거론했던 ‘부자와 빈자’의 문제를 두고 한국과 중국을 비교함으로써 이 글의 결론으로 대신하려 한다. 부자와 빈자가 한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다고 가정해 보자. 한국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다.

한국의 많은 부자들은 식사 내내 자신의 성공담이나 교양있는 대화로 좌중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품위를 높일 것이다. 빈자는 늘 듣는 입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인 빈부격차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돌아가면서 얘기하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부자가 말 수를 아끼는 경우도 많다. 건배도 돌아가면서 한다. 사회주의적 빈부격차란 많은 경우에 평등 앞에서 무의미한 관념이 된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라는 말이 중국에서 아직까지는 진실이다. 실제로 평등을 실현한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할 수 없다. 평등이란, 그것을 추구하는 신념 속에서만 가능하다. 거대한 중국을 지탱하고 있는 정신적 힘은 ‘중화주의’가 아니라 ‘평등과 꽌시’에 대한 신념, 그것이라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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