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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래구 수안동지하철 역사 공사현장에서 발굴조사 된 동래읍성의 해자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인골, 갑옷을 비롯한 무기자료가 다수 출토된 바가 있다.
이를 계기로 현재 육군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부산진순절도(보물 391호】와【동래부순절도(보물 392호】에 대한 반환운동이 안락서원의 유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안락서원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시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측과 수차례의 협의를 통해 부산박물관에 대여 ·전시하기로 합의하여 올해 7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대여하고, 이후 1년마다 대여기간을 연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부산진순절도는 1592년 4월 14일 고니시유끼나가(小西行長)가 일본의 선봉군인 제1군 1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진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것으로 당시 성내의 군사는 1000명 정도로 남문루 위에서 활을 쏘고 있는 부산첨사 정발장군을 위시한 주민들이 장렬하게 싸우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부산진성은 동구 범일동, 좌천동 일대로 현재 성터는 남아 있지 않으나 문헌기록에는 1488년(성종 19)에 축조한 둘레 5,356척 규모의 성으로 나타나 있다.
동래부순절도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인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싸우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성민들의 전투 내용을 조감도식으로 그린 기록화이다.
부산진순절도와는 달리 송상현을 비롯한 양상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비장 송봉수, 김희수, 유생 문덕겸, 향리 송백, 겸인 신여로, 송상현공의 첩 금섬과 읍인 김상과 이촌녀, 경상좌병사 이각의 활동 스토리가 시간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동래읍성은 문헌상 고려 우왕 13(1387)년에 둘레 3,090척 높이 13척, 세종 28 (1446)년에 석축 둘레 3,092척 높이 15척 규모의 성으로 이때에 축조된 성이 동래부순절도에 보이는 성이다.
2002년 복천박물관의 복천동 304번지 현장 발굴조사로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성벽의 존재가 최초로 확인되었고, 이후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지하철3호선 수안정거장 부지 발굴조사에서 해자와 해자 내에서 다수의 인골과 무기가 출토됨으로써 동래부순절도는 임진왜란 당시의 동래읍성전투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존하는 동래읍성은 임진왜란 때 함락된 후 폐성되었다가 영조 7(1731)년 다시 축조한 것으로 둘레 17,291척(약2.7km), 높이 13척 규모로 이전의 동래읍성 규모의 5배 정도에 달하며 동서남북에 4문과 옹성을 부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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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본과 전체적인 구도가 유사한 충렬공 송상현 종택(충북 청원군 갑내면)소장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 채색필사본, 18세기 후반)가 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본에서는 송부사가 남문 문루 뒤에 붉은 조복으로 좌정하고 있으나 종가순절도 에서는 남문 문루는 문이 닫혀 있고 송부사로 추측되는 전복차림의 장수가 문루 동쪽 성벽 위에서 성 밖을 주시하고 있다.
또한 그림 상반부의 순절 장면도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본은 붉은 조복으로 북향 단좌하고 있으나 종택 순절도 에서는 백색 도포로 남향하여 단좌한 장면이 그려져 있고 특히, 주요한 인물 옆에는 성명이 기재되어 있고 읍성 내의 관아 건물 배치가 뚜렷하게 묘사되어 충절을 기리기 위한 기록화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육군박물관 본에는 인명이 없는 대신 1709년(숙종35)부사 권이진이 화기를 지어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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