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능의 육조단경(六祖壇經) 중에서 -
다음은 정신병동의 한 장면으로 보인다. 넷 중 누가 가장 높은가?
A - 나는 세계를 정복한 대제 알렉산더이다.
B - 나는 알렉산더의 아버지, 대왕 필립이다.
C - 나는 알렉산더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이다.
D - 웃긴다, 나는 알렉산더를 암살한 킬러이다.
고독해서 그럴까, 요즘 세상은 제 잘난 맛에 사는 자가 너무 많다. 때로는 우격다짐으로 자기 프라이드를 내세운다. 그러면 촛불이 드리운 자기 그림자의 어두운 그늘처럼 더욱 애처롭게 다가온다. 이런 인간은 대체로 남의 의견 따위 일고의 가치도 없다. 스승은 물론 친구도 없다. 어떤 종교든 그에게 미신일 따름이다. 갈등을 모르는 원숭이처럼 애써 제 모순을 감춘다.
사람은 역설이란 그물에 갇혀있거나 그 코에 걸린 물고기 같다. 그것도 몇 겹으로 접혀져 있다. 일찍이 붓다는 이런 상태를 고(苦)라고 갈파했는데, 여기로부터 해탈은 짐승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다. 위기가 기회이다. 말하자면 인류는 그 역리를 비틀고 문명의 꽃을 피워냈다. 언어가 그 표현이라면, 종교는 그 핵이다. 불교는 뿌리부터 우리민족과 코드가 잘 맞는 종교였다.
“마하반야바라밀다 심경”은 모두 260 개의 한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 표제어 “반야바라밀다”가 다섯 번 나온다. 무형의 관자재보살이 유형의 사리자에게 말씀을 전하는 형식이다. 빌 공(空)이 7번, 아니 불(不)이 9번, 없을 무(無)가 21번, 각각 거듭 강조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제사바하” 같은 진언(眞言)이 두 번 나타난다.
아래와 같이 가정해보자. 불교 범어는 우리말과 깊은 관련이 있다.
1. 석탈해(昔脫解)의 석가(昔家)는 석가(釋迦)와 같은 족속이다.
2. 탈해는 금속 농기구를 제작하여 신라를 농경문화로 이끌었다.
3. 5세기경 김씨 왕족의 불교공인 이전에 이미 민간불교가 성행했다.
4. 신라계열 성씨가 현재 한반도를 주름잡듯 우리말 역시 신라 말이다.
“마하”는 경상도 말로 “마카”이다. “모두 통틀어서”라는 뜻이다. “반야”는 “바른 님”이다. “바라밀다”는 “바로 믿자”로 볼 수 있다. “아뇩다라”는 “아늑하더라”, “삼먁삼보리”는 “잘 맞고, 잘 보자” 이렇게 풀 수 있지 않을까.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제사바하”는 “가세 가세 바로가세, 바로 잘 가세, 부디 살피사” 이런 정도가 아닐까.
반야심경을 이와 같이 접근하면 한결 읽기 쉽다. 또 짧지만 260자를 일곱 조각으로 나누면 일관된 논문 같다. 제1편 서론(觀自-苦厄 25자), 제2편 空(舍利-如是 27자), 제3편 不(舍利-不減 20자), 제4편 無(是故-死盡 52자), 제5편 열반(無苦-涅槃 49자), 제6편 결론(三世-切苦 52자), 제7편 부록(眞實-婆訶 35자) 등이다. 제2-5편 사이가 본론으로, 공이 열반을 이끌어낸다.
색(色)이 품고 있는 스펙트럼은 넓다. 세상, 자연, 형태, 물질, 육체, 몸, 심지어 마음까지 된다. 공(空)은 신(神), 영(靈), 법(法), 리(理) 등이다.
반야는 생명의 지혜로서 영혼의 구원을 모색한다. 그 목표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깨달음(佛)이다. “색과 공은 둘(人)이 아니(弗)고 하나다”라고 해서 불(佛)이다. 또 불(弗)은 만(卍) 자 돌개바람의 입면도를 보인다. 그 입체적 반전에서 동사가 해탈이고, 명사가 열반이다. 해탈은 생명에서, 열반은 존재에서 또 다른 상태이다. (자네, 그래서 어쨌단 말인고? 뜨끔.)
시자(侍者) - 저는 너무 기쁩니다. 자유로움을 느끼죠. 드디어 탈속했어요.
한쪽 눈으로 쳐다보던 선사(禪師)가 회초리로 시자의 무릎을 “탁” 쳤다.
시자 - 아야! 스님, 왜 이러시는 거예요?
선사 - 네가 세속에서 벗어났다는 거기에서 거듭 벗어나라고 그런다.
시자의 탈속은 도가(道家)와 같다. 불가(佛家)는 중복하여 탈바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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