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 네타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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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 네타냐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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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총회에서 연설 중인 파시스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 사진=타임스 오브 이스라엘 

파시즘(Fascism)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발생한 정치적 이념이다. 강력한 국가주의, 권위주의, 반(反)공산주의 주창하는 이념이며, 군사적 팽창을 강조한다.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념이며,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지도력을 요구한다. 통상적으로 국가 개입의 경제정책, 국가의 사회통제,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인종차별)가 파시즘을 이룬다. 파시즘은 국가가 최우선이어야 하므로 때때로 국가폭력을 정당화한다.

2024년 한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으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 씨의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른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는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시적 산문으로 노래하고 있다. ‘국가폭력’은 이미 과거의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혹은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는 환영 받지 못할 파시즘이 건전한 정신에 혼란을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참혹한 현실이다.

우선 세계사에서 잊지 못한 몇몇 파시즘 지도자들을 살펴본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창시자’(a founder of fascism)로, 1922년부터 1943년까지 이탈리아의 총리로 재직하며 파시스트 정권을 세웠다. 무솔리니에[ 못지 않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나치당의 수장으로, 1933년 독일의 총리로 취임 후 파시즘을 더욱 극단화하여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Holocaust, 대학살)를 이끌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 후 1939년부터 1975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하며 권위주의적 정부를 세웠고, 포르투갈의 안토니오 살라자르는 독재자로서, 1932년부터 1968년까지 국가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를 펼쳤다.

또 다른 인사는 옛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으로, 공식적으로는 ‘파시즘이 아니지만,’ 그의 독재적 통치 방식은 ‘권위주의적 요소’와 ‘억압적 정책’으로 비판받아 왔다. 실질 내용상 파시즘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같이 파시즘은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불안 속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얼굴을 내밀었으며, 결과적으로 발생한 전쟁과 폭력은 세계 역사에 엄청난 상처와 교훈을 주고 있다. 대한민국에도, 이스라엘에도, 미국에도 파시즘 지도자 출현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사회불안, 분열, 경제적 불평등 등이 파시즘 지도자를 요구할 수도 있다.

‘비비 네타냐후’(‘비비는 네타냐후의 별칭)가 유럽과 전 세계의 인종차별주의자, 신(新)파시스트, 신(新)나치 우익 쓰레기들(right-wing scum)의 총애와 우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 조르고스 미트랄리아스(Giorgos Mitralias)는 이같이 묻고는 “답은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이 쓰레기들은 비비 네타냐후가 자신들의 살덩어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를 인정한다. 네타냐후의 이스라엘을 그들의 꿈(반대자들에게는 악몽)의 모범 국가로 만든 그의 호전적인 행위와 다른 "공적" 때문만은 아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찬양하고 그와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네타냐후가 그의 기원, 훈련, 멘토 덕분에 순수한 파시스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미트랄리아스는 “떠오르는 브라운 인터내셔널(Brown International)의 거물들, 미국의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인도의 나렌드라 모디 총리,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빌레이, 브라질의 전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 이슬람 혐오주의자, 동성애 혐오주의자, 여성 혐오주의자, 파시스트, 신나치주의자(그리고 종종 반(反)유대주의자!)인 주요 극우 정당의 지도자들은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헝가리와 같은 EU 회원국을 통치하거나 통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이를 모른 척한다. 즉, 베냐민 네타냐후가 기회주의적이거나 전술적인 이유로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매력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그들의 이념, 그리고 물리적 폭력에 대한 선호도에서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나아가 비비 네타냐후는 이츠하크 샤미르(Yitzhak Shamir)에 의해 정계에 뛰어들었다. 특히 후자가 이스라엘 총리(1986-1992)이자 집권 여당인 리쿠드의 지도자였을 때였다. 두 사람 사이의 선거적 유사성은 샤미르가 1984년 유엔 주재 이스라엘 대사였던 젊은 네타냐후를 자신의 외무부 차관으로 임명한 후, 1993년 리쿠드당 대통령직을 네타냐후에게 넘긴 때부터 분명했다.

네타냐후가 47세의 나이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따라서 네타냐후가 이츠하크 샤미르를 항상 자신의 "보호자"일 뿐만 아니라 이념적 멘토로 인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네타냐후가 항상 샤미르의 이념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샤미르의 후계자이자 정치적 상속인인 척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질문은 이츠하크 샤미르가 평생동안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섬겼던 이념이 무엇이었는가이다. 1942년 영국 경찰이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아브라함 스턴‘(Avraham Stern)을 처형한 후, 젊은 샤미르가 준군사적 시오니스트 테러 조직인 레히(Lehi)의 지도부를 맡았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레히‘ 조직은 “이스라엘의 수정시오니즘, 민족 볼셰비즘(마르크스주의자들) 성향의 군사 조직이며, 영국을 유대 민족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보고 증오했다. 레히는 영국이 아랍 폭동을 막기 위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막았던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집단은 정치 체제로써 좌익 내셔널리즘과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비비 네타냐후의 정치사상적 뿌리도 레히 조직의 이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레히는 세상이 “한편으로는 싸우고 지배하는 종족, 다른 한편으로는 약하고 타락한 종족”으로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히브리인들은 고대의 ‘전사이자 식민지 개척자’의 미덕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브라함 스턴이 죽은 후, 레히는 매우 다른 의제와 이념을 가진 여러 분파로 분열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문제에 동의했다. 테러리즘이 (선호되는) 행동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레히 지도자들, 그리고 물론 이츠하크 샤미르는 항상 대규모 테러 작전(샤미르가 지도자)을 옹호했다. 그 작전에서 그들의 조직은 단독으로 또는 이르군(Irgun : 유대인 군사 지하조직)과 함께 주인공이 됐다.

이 모든 것은 팔레스타인과 해외(런던)에서 영국인, 아랍인, 심지어 유대인 사이에서 수천 명의 사망자를 냈다. 가장 악명 높은 테러 행위 중 팔레스타인 마을인 데이르 야신(Deir Yassin) 학살과 1948년 유엔 ‘팔레스타인 중재자’ 베르나도트 백작 암살 사건은 레히 지도자들과 무장 세력에 의해 고안되고 실행되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1948년 유대인 지하 조직 LEHI(레히)의 구성원들이 팔레스타인 분할 계획을 수정하려는 외교적 노력에 항의하여 유엔 평화 중재자 폴크 베르나도트(Folke Bernadotte) 백작을 살해한 것이다.

베냐민 네타냐후의 파시스트, 인종차별주의, 테러리즘 이념적 기원과 더불어, 네오나치, 파시스트 및 기타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자들과의 현재 관계는 어떨까?

미트랄리아스는 “레히의 지도자 ‘이츠하크 샤미르’와 ‘아브라함 스턴’, 그리고 그들의 멘토이자 극우 ‘수정주의’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제브 자보틴스키(Ze’ev Jabotinsky), 그리고 심지어... 비비 네타냐후의 아버지도 역설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익 시오니즘의 역사적 인물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그들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동맹을 제안하고 때로는 맺는 것에 대한 양심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인슈타인이 지난 44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사람들을 "파시스트"라고 불렀을 당시 “전략적 동맹”과 네타냐후와 그의 친구들이 ‘우연히 또한 반유대주의자라고 맹세한 국제적 찌꺼기들인 반공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과 더불어 바람을 피우는 것을 놀랍지만 정상적이다.

그들의 첫 번째 스승은 다름 아닌 시오니스트 수정주의의 아버지이자 이론가인 제브 자보틴스키였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병적인 증오심에 이끌려 자보틴스키는 1922년 우크라이나의 반공주의자이자 민족주의 군벌 시몬 페틀류라(Symon Petliura)와 동맹을 맺었고, 그의 군대는 1917년과 1922년 사이에 897건의 반유대주의 프로그램을 실행했고, 최소 3만 명의 우크라이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네타냐후의 아버지는 자보틴스키(Jabotinsky)의 비서로 일했고, 자보틴스키가 아바 아히메이르(Abba Ahimeir)와 갈등을 빚었을 때 그를 따랐다. 자보틴스키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저널리스트, 역사가, 정치 활동가인 아바 아히메이르가 유대인 무솔리니가 명백히 파시스트 시오니스트 정당의 수장이 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이 이념가이자 파시스트 이론가의 가까운 협력자였던 비비의 아버지는 아히메이르 조직의 출판물을 편집했는데, 이 조직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나치 독일과는 결코 같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933년에 히틀러를 칭찬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네타냐후의 멘토와 그의 테러 조직은 더 심각하다. 레히의 창립자이자 지도자인 아브라함 스턴은 2차 세계 대전 중에 레바논 베이루트에 있는 제3제국의 대사관을 통해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형태로 동맹을 제안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보틴스키, 아히메이르, 베긴, 샤미르를 특징짓는 바로 이러한 냉소주의와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는 태도, 다시 말해 네타냐후의 선구자이자 사상의 거장들이 오늘날 네타냐후가 극우와 세계 파시즘의 핵심 인물들과 동맹을 맺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그의 극우 반동주의자이자 몽매주의자 동맹이 반유대주의자이거나 그 아류이거나, 예전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주의자(pogromists : 집단학살자)와 또 다른 왕년(yesteryear)의 집단 학살자의 ‘향수주의자’인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네타냐후와 그 동조자들은 회개하지 않는 위선자들에 불과하다.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살시키고 추방하고, 중동에서 메시아적 꿈의 대(大)이스라엘을 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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