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을 무조건 따르자는 북한 주체사상의 마지막 모습은 빈곤, 아사 그리고 문맹

지금은 사라진 동독을 기억하는 것도 새롭다. 필자는 40년 전 또 하나의 분단국이었던 독일(서독)에서의 추억과 동독의 마지막 모습이 가끔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필자가 서독 땅을 밟았을 때(1985년)는 신냉전으로 Time 지 등에서 미·소의 핵무기 숲속에 있는 유럽이 자주 만화로 나오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서독은 평온했으며, 대학이 제공한 국경관람 투어도 예상과 달리 평화로웠다. 안내를 맡은 국경수비대원은 자신은 경찰이며 이것은 동서분단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가리키는 국경은 무시무시한 장벽 앞 100미터 쯤 앞이라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베를린장벽도 2중 장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보이지 않았고 너머에는 동독 마을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국경 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서독이 전파를 공유하여 방송을 상호시청 하는 것과 서독대학에서 유학 중인 동독학생을 만난 것이었다. 심지어 열차여행 중 만난 동독에서 온 할머니를 만난 것도 충격이었다. 그녀는 고향방문차 동독에서 왔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무력도발로 얼룩진 남북대치를 생각하는 한국 유학생에게 1970년대 소위 독일사회당(SPD)이 주도한 '동방정책(Ostpolitik)'의 영향을 새삼 생각나게 했다. 동방정책은 전후 곳데서부르크 테제라는 소위 사회주의 무력혁명의 포기를 당 정강으로 선언하고 서독에서 정당인가를 받고 70년대에는 집권당이 된 사회당의 대동독 독트린이었다.
전후 서독은 연합국의 견제속에 보수정당(CDU/CSU)이 오랫동안 집권을 하였으며 소위 '라인강의 기적'이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보수정당은 반공정책을 수용하여 분단과 동독의 존재를 부정했다. 1970년대 개방주의 열풍으로 집권한 사회당은 반공정책의 토대위에서 소위 새로운 강령, 즉 동독정부는 인정하지 않지만 분단의 현실로 동독정부와 동독주민을 분리하고 동독주민의 서독방문과 방송교류 등을 개혁과 개방정책으로 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한반도와 전혀 다른 분단사도 전제되었다. 동독을 점령한 소련군은 연합국과의 협상으로 베를린을 분할점령하였으며, 동서독간 자유왕래를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20년 가까이 허용한 결과는 동독인구 상당수(300만)가 서독에서 돌아오지 않아 결국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것이었다.
그러나 서베를린에로의 자유왕래가 지속되고 동독TV로 확인한 동독의회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이 대형 부조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동독은 스탈린격하운동의 영향으로 집단지도체제를 운용중이었고 동서대립을 격화하는 무력도발은 자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구와 경제력에서 나타난 격차는 잠재하는 불안요소였다.
아이러니 하게도 동독을 붕괴시킨 것은 같은 분단국이었던 한국이었다. 한국의 군사정부는 의욕적으로 88올림픽을 유치했고 올림픽을 앞두고 무역과 국제수지에서 놀라운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모스크바(80년) 올림픽에 이어 LA올림픽(84년)이 반쪽 대회로 전락하고 12년 만에 명실상부한 정상대회를 위해 동독정부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했다.
올림픽이 개최되자 동독정부의 기대대로 풍성한 성과가 나타나자 이에 편승해 동독은 일일 3차례, 매회당 2시간을 서울올림픽 중계로 이어졌다. 이것은 2회 회당 1시간에 그친 서독과 명백히 대비되었다. 마침내 올림픽에서 동독은 금메달 기준 미국을 제치고 소련 다음인 세계 2위로 마감했다. 동독의 선수단장이자 피겨요정 카트리나 비트는 자랑스럽게 호네커 서기장 앞에 보고를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은 스포츠에 끝나지 않았다. 올림픽을 통해 동서대결이 약화되자 이듬해 초 헝가리 국경수비대는 오스트리아 국경에 설치된 철조망을 철거했다. 이것은 불과 수개월 후 단체로 휴가온 동독인들이 집단으로 탈출하는 방아쇠가 되었다. 헝가리에서의 집단탈출은 곧 폴란드, 체코 등에 휴가온 동독인들의 집단탈출로 이어진다.
국민들의 집단탈출에 놀란 동독정부는 결국 전면적 국경폐쇄로 대처했으나 이후 동독주민들의 집단저항으로 결국 해체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 주창자 마르크스의 언명처럼 경제는 생각과 체제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동독인들은 올림픽 메달이 아니라 서울올림픽이 보여주는 '한강의 기적'을 동경하여 자본주의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 중인 우리에게 동독사태가 주는 교훈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동독은 국가정보부(Stasi)를 통해 30만에 이르는 사찰대상자를 관리하고 서독에는 3만에 이르는 협조자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정치, 언론, 학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협조자가 있었던 것이며 일부는 광주사태에도 참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의 교훈은 북한의 예외성과 저열성이다.
필자가 지켜 본 동독의 마지막 모습은 북한과는 사뭇 달랐었다. 동독에는 역사학의 구루가 있었고 그는 서독에서도 공식발표를 하기도 했다. 필자는 동독이 발행한 정치경제서를 보면서 그들의 기술이 고대, 중세, 자본주의, 제3세계 등 마르크스 역사이론에 충실한 것으로 확인하게 된다. 반면 김일성이 부조된 인민회의장에서 중국식 회의를 하는 모습과 지금은 인쇄물 마저 품귀로 오물풍선에 최고존엄의 초상마저 동원되는 북한을 보게 된다. 수령을 무조건 따르자는 주체사상의 마지막 모습은 빈곤, 아사 그리고 문맹이며, 여전히 남조선에 많은 간첩이 존재하는 역설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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