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최후맞은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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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최후맞은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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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땅! 땅! 한반도 땅 강탈 음모계획, 실행자의 말로(末路)

^^^▲ 이토 히로부미^^^
우리에게 이등박문(伊藤博文)으로 널리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란 국가적 원수(怨讐)

인생 뭐있나?

살아가면서 땅이라도 넓게 차지하라고 '넓을 박(博)' 자를 이름으로 사용했던가.

그는 1841년 야마구치현(山口縣) 출생으로 1909년 10월 차디찬 시베리아 혹한이 몰아치는 하얼빈 역에서 땅! 땅! 땅! 세발의 총탄을 맞고 만 68세를 일기로 많은 탐욕의 인생을 비참하게 마쳤다.

이토 히로부미는 ‘에도막부를 힘으로 무너트리자!’고 뭉친 토막파(討幕派)의 일원으로 밀항선을 타고 영국 유학까지 갔다 온 인물이다. 그는 유신의 공로자로 촉망 받는 그룹 중의 선두 주자였다. 그는 메이지유신 성공 직후인 1868년부터 ‘무례한 조선을 치자!’는 정한론(征韓論)에 적극 동조한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날강도 일본 정치가들은 한반도 ‘땅’에 군침 흘리며 마침내 음흉한 계획을 세워 착착 진행시키니, 그 첫 번째 흉계가 갑자기 조선은 일본을 상국으로 모시는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자고 엉뚱한 제안을 하다 거부되자, 방귀 꾼 놈이 성질낸다는 속담처럼 ‘무례한 조선을 치자!’며 정한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1875년에는 한반도 땅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남의 나라 바다를 측량한다는 해괴한 요구를 하다 조선이 반대하자 생트집을 잡고 강화도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1904년의 1차 한일의정서와 1905년의 2차 한일의정서(을사보호조약)를 을사5적들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강제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07년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해 온 것이다. 이 모든 흉계의 우두머리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였다.

히로부미는 이미 메이지유신 성공 후부터 한반도 땅을 빼앗기 위해 흉계와 음모로 차근차근 한국을 강제 합병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는 주역의 역할을 하면서 완전한 합병을 이루기 바로 전에 차디찬 하얼빈 역 앞에서 동양평화와 대한제국의 주권회복을 외치는 안중근 의사의 의분에 찬 총탄 세례를 자장가로 들으면서 탐욕의 땅 귀신이 되고 말았다.

남의 땅을 헐값에 사거나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측량 신고를 하지 않은 한국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 수탈해가는 등 일제의 땅 도둑질은 식민지 시대 극성을 부렸다. 마치 오늘날에도 독도가 일본 땅이라며 교재에 실어 교육시키는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땅 도둑 나라는 오늘도 과거처럼 탐욕을 부린다.

한반도보다 큰 땅을 가진 일본이 한반도 땅마저 취하기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내달리던 메이지정부의 최선두에 탐욕스럽고 음흉한 이토 히로부미 옹(翁)이 앞장서다가 땅! 땅! 땅! 분노에 찬 총알 소리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아마 땅! 땅! 땅! 요란하게 울려 퍼지던 총소리조차 이토 히로부미 귀에는 땅(土地)! 땅(土地)! 땅(土地)!으로 들리지 않았을까? 남의 땅 좋아하다가 땅! 땅! 땅! 땅박이 귀신이 된 이토 히로부미, 그로부터 일본은 역사적 교훈을 얻어 침략근성을 버려야하는데 아직도 독도를 일본 땅이라 우기며 땅 도둑놈 같은 야비한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남의 땅 좋아하다가 망한 사람이나 나라가 한 둘이 아니건만 우리는 아직도 땅 투기와 사재기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아야할 때이다. 땅 좋아하다가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전철을 밟는 불행한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땅! 땅! 땅!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요란한 땅! 소리,

총소리인지 투기소리인지 그 해명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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