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벗기, 허물 덮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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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벗기, 허물 덮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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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남자의 콤플렉스

단단한 껍질, 내 몸인 양 오래된, 익숙한 표피
정신을 잃을 듯한 냄새도 이미 맡을 수 없게 된 무감각
- 인터넷, 허물이란 글에서 퍼온 구절 -

남자들은 두셋만 모여도 돌처럼 서로 부딪친다. 통일된 하나의 의견을 도출하는데 부싯돌처럼 불꽃을 튀기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누가 분위기를 주도하느냐에 따라 의사(意思)가 어느 한쪽으로 기운다. 이것은 일상적이며 흔한 경우이지만, 여기에 이권(利權)까지 개입되면 갑자기 긴장되고 때로 칼부림도 곁들인다. 남자의 세계에는 늘 권력투쟁의 피비린내가 배어 있다.

집단적으로 뭉쳐서 사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보통 연장자보다 등치 큰 놈이 서열이 높다. 수컷 두 놈이 싸우기 전에 먼저 키를 대본다. “너 죽을래, 살래?” 기세싸움이다. 우리나라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전통으로 가문의 촌수를 대거나, 이것이 같을 때 생년월일까지 따져서 위아래를 정한다. 이때 당당히 써먹는 말에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이다.

남성문화의 전시장인 군대(軍隊)에서는 계급이 같으면 입대 이후 밥그릇 수까지 따져 서열을 정한다. 만약 그것마저 같은 훈련동기인 경우 군번까지 대봐서 반드시 순서를 정하는 것이 명령권을 세워는 지휘법이다. 남자끼리는 죽마고우(竹馬故友)일지라도 이와 같은 심리적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야, 너 많이 컸다!”, 친구의 야코를 죽일 때 쓰는 전술이다.

신숙주(이하 나), 성삼문(이하 너)과 이와 같은 얽힘을 겪었다. 나이로 따지면 하나 위인데, 급제로 따지면 하나 아래다. 따라서 관직에서는 네가 한발 앞서 나갔다. 나는 너를 따라잡기 위해 독서량을 늘렸다. 네가 한 권 읽었다면 나는 두 권 읽을 것이다. 특히 언어만큼은 문학과 달라 확연하게 밖으로 차별이 날 것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넌 나와 경쟁을 포기할 것이다.

집현전에서 우린 함께 밤을 새워 연구하며 어진 임금께 정책을 제안하였다. 친구로서 어울렸지만 라이벌로 경쟁했고, 서로를 자극하며 토론으로 겨루었다. 그러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당시 요동에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우열이 드러나기 시작했었지.

황찬은 우리 모두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나를 더욱 존중해 나한테 희현당(希賢堂)이란 아호를 주기도 했지. 내가 그와 중국말로 직접 통할 때 오가는 미세한 느낌까지 너는 따라올 수 없었던 거야. 따라서 훈민정음은 내가 너보다 주도적으로 창제할 수밖에 없었지. 관직도 여기서부터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어. 너로선 받아드리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이것은 현실이었다네.

계유정난(1453)은 새로운 시대로 출발하는 분수령이었다. 이때 네가 보여준 정치적 감각은 덕치(德治)적이었는데 흠잡을 수는 없지만 돋보이는 않았지. 당연히 나는 2등 공신이었고, 너는 3등 공신으로 대우받았지. 그러다가 세조의 등극(1455)을 기점으로 마침내 우리 둘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지. 너를 역신(逆臣)으로 죽고, 나는 명신(名臣)으로 남고.

뭐? 내가 간신이고, 네가 충신이라고? 정치와 권력의 특징을 잘 깨닫지 못하고 하는 소리야. 국가단위의 윤리는 인륜과 다르지. 논어만 알고, 한비자(韓非子)를 모르는 소치야. 수주대토(守株待兎)의 뜻을 아는가? 변통(變通)을 모르거나 노력 없이 요행(僥倖)만 기다림을 비웃는 말이라네. 50년이 된 새 왕조가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국가라는 것은 우리가 일하기 나름이지.

세조(世祖)라는 왕의 시호(諡號)는 세종(世宗)과도 버금가는 것이다. 이는 수양대군의 허물 벗기를 신숙주가 허물 덮기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또 역으로 신숙주의 어두운 그림자를 세조가 무지개처럼 찬란하게 비춰주었다. 신숙주는 어학자에서 정치가로, 외교가에서 행정가로 적절하게 변신하면서 자기생애를 시대와 환경에 따라 한편의 드라마처럼 편성했다.

바흐의 "푸가의 기법(BWV 1080)"은 4성(四聲)을 대위법(counter-point)으로 연결시킨 음악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특히 그가 B-A-C-H 음을 기보하다 죽어서 이 부분 악보가 그의 묘비에 사용되었다하여 더욱 화제가 되었다. 푸가의 4성대위법은 마치 신숙주의 삶을 연상케 한다. 만약 한국이 영원하다면, 신숙주의 곤충 같은 생존능력은 찬양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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