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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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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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산업혁명과 산업전사 - ③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업의 수출전환」을 도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생산업자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는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진흥뿐. 그러니 온 국민은 수출전선에 적극참여 해야하고 수출전사에게는 성원을 보내자"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의 등장

5.16 군사혁명 후 상공부장관은 자주 바뀌었다. 상공부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17대 정래혁 장관이 1년 2개월 재직하고 현역으로 복귀한 후, 18대 유창순 장관이 7개월, 19대 박충훈 장관이 6개월, 20대 김훈 장관이 4개월, 21대 이병호 장관이 5개월 등 반년 사이로 바뀌어 갔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업의 수출전환」을 도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생산업자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는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진흥뿐. 그러니 온 국민은 수출전선에 적극참여 해야하고 수출전사에게는 성원을 보내자"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1964년 5월 10일은 일요일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좀 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박충훈 전 상공부장관(19대)이었다. "나 상공부장관으로 재임명되었는데, 상공부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참고로 하겠으니 적어 가지고, 오늘 오후 집으로 와주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시간에 맞추어 청파동에 있는 박 장관 댁으로 찾아갔다.

박 장관은 "오늘은 새벽부터 낚시터에 갔는데 몇 시간쯤 지나서인가, 순경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와서는 '청와대에 긴급 연락을 하라는 지시입니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래서 전화를 거니 상공부장관으로 재임명 되었다는 거야, 그 순경 그 넓은 저수지에서 나를 찾느라고 무척 고생을 했대" 하고 웃었다.

강태공은 고사(故事)에만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박장관은 이 때 제22대 상공부 장관으로 중임되었고, 3년반 재직하다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승진하였다. 그 후 국무총리, 더 나아가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하였다.

나는 몇 가지 건의를 올렸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수출문제였다.

필자:
"장관님, 이번 대통령께서 상공부장관으로 재임용하신 것은 수출에 주력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출이라면, 장관님이 제1인자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현재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났으니, 상공부로는 수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박장관:
무슨 묘안이 없을까?

필자:
지난 5월 3일 소위 5.3 환율인상으로 환율이 1달러당 130원에서 255원으로 배가 올라가 거의 실세에 가깝게 되었습니다. 이야말로 수출을 증가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보여집니다. 장관님,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을 주로 수출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천연자원이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박장관:
그래서?

필자:
우리나라도 일본이나 대만처럼 공산품을 수출해야 합니다.

박장관:
가능한가?

필자:
물론입니다. 5.3 환율인상으로 우리나라의 노임이 ―달러로 환산해서― 일본은 물론이요, 대만, 홍콩,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보다도 싸졌습니다. 똑같은 물건을 싼 노임으로 생산한다면 생산원가가 싸지고 따라서 수출도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1962년도의 대만의 수출액은 2억 1,900만 달러, 필리핀이 5억 5,400만 달러나 됩니다(註: 1962년 우리나라 수출은 5,500만 달러).

박장관: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무역은 무역업자만의 관심사였고 무역행정은 상역국만의 전담사항이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수출공산품을 생산하는 것은 무역업자가 아니고 생산업자입니다. 좋은 물건을 값싸게 만드는 것도 생산업자인데 현재 생산부서에서는 수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수출의 주력무대를 생산업자 체제로 전환해야 하고, 여기에 대한 책임은 상역국이 아닌 공업국에서 져야 합니다.
 
이때 박 장관은 아무말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필자:
장관님!, 일본정부의 통상성에도 ―기계수출과 화학수출과 일용잡화 수출과 등― 수출과(課)는 상역국에 속하지 않고 공업국에 속해 있습니다.

 
이 한마디에 박장관은 완전히 납득이 갔다.

다음날인 5월 11일, 장관 임명장을 받고 대통령에게 앞으로의 상공정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수출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중요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격려도 해 주시고 애로도 타결해 주셔야 합니다. 금년 목표는 1억불입니다. 이 목표는 꼭 달성하겠습니다."라고 강력한 건의를 올렸다고 한다.

그 길로 상공부로 내려와서 취임식을 했다. 대통령에게는 1964년도에 수출 1억 달러를 약속하고, 취임식 자리에서 1억 2천만 달러로 늘려 발표하였다. 상공부는 수출 총력체제로 완전 개편을 해나가게 된다.

박 장관이 취임한 지 50일이 지난 후였다. 나는 1964년 6월 30일 공업 제1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공산품 수출의 총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이라는 수레바퀴의 시동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입장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본다.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바는 "선진국이 되고 복지국가가 되는 것"이다. 기본원리는 「수출, 고용, 소득증대」이다. "비전"은 「산업혁명, 인간개조, 국토개조」이다. 현재 시점은 이러한 역사적, 거국적 대 역사(役事)에 착수할 수밖에 없는 시발점에 서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렇게 거대한 '수레바퀴'를 어떤 방법으로 시동을 거느냐?" 또 "누가 이를 담당해야 하는가?"이다. 그런데 이 책임이 필자에게 떨어진 것이다.


즉 「공업의 수출전환으로의 개편작업」의 총책임을 져야 한다. 더 나아가서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거국적 대 역사(役事)의 수레바퀴를 시동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 것이다. 필자는 우선 "공업의 수출전환으로의 개편작업"을 거국적인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하겠다고 느꼈다.

당시만 하더라도 무역업자라는 것은 "오파상"이라고 해서 그다지 평판이 좋지 못했다. 당시 물품을 수입하려면 한 건마다 상공부에서 수입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외화가 귀할 때라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수입허가만 받으면 그 즉시 큰 이권이 됐으며 큰돈을 벌었다.

한 예로 255원을 주고 1달러의 물건을 수입하면 약 3~4배인 1,000원의 값으로 팔 수 있었다. 물감(染料)같은 것은 종류에 따라서는 10배가 남았다고 했다. 그래서 "오파상"이라는 것은 폭리의 대명사였다. 그런데 달러가 귀하다 보니 수출과 링크(Link)를 시켰다.

즉 수출한 대전(代錢)은 수입하는데 쓸 수 있게, 즉 수입권을 준 것이다. 일종의 수출장려책인데 이 조치로 말미암아 수입업자는 수입권을 얻기 위해서 억지로 수출을 하는 묘한 현상이 생겨났다. 수출에서는 적자를 보고 수입에서는 폭리를 남기는 식의 무역이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였으니 무역상이라는 이미지는 국민에게 좋게 비칠 리가 없었으며 이런 묘한 수출이 계속되다 보니 수출은 으레껏 적자를 보는 것이라는 관념이 생겨나게 됐다. 결국 우리나라에는 수출할 만한 공산품은 없다는 것이 당시 생산업자나 일반국민의 의식 속에 있었다.

 


그렇다면 「공업의 수출전환」을 도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생산업자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는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진흥뿐. 그러니 온 국민은 수출전선에 적극참여 해야하고 수출전사에게는 성원을 보내자"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이다.


구체적인 수출진흥전술로는 육하원칙을 쓰기로 했다.

▶ How : 수출진흥 전략으로 '임팩트 폴리시'를 활용

수출을 장려한다고 이것저것 다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공격목표를 선정한 후 집중공략하는 방식이다. 그 요점은 이런 것이다.

첫째, 모든 업종을 느슨하게 도와주는 것은 안 된다. 품목의 성격상 우리나라에 유리한 품목을 골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즉 특화산업 육성이다. 그것도 일시에 하는 것이 아니라, 몇 개 업종씩 단계적으로 골라서 실시한다.

둘째, 선정된 특화업종을 생산하는 업체라고 해서 모두 다 도와주는 것은 안 된다. 그 업체가 수출하느냐, 안 하느냐,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오는 업체는 도와주고, 방관하는 업체는 제거해야 한다. 업체수도 처음부터 많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수를 늘려 나간다.

셋째, 선정된 업체에 대해서는 수출을 제대로 하는 한, 힘껏 도와 주어야 한다. 관민 일체가 되어, 구식기계는 최신 것으로 교체하고, 자금이 필요하면 달러든, 원화든 지원한다. 금리도 싸게 하고, 운영자금도 필요한 만큼 준다. 수출용 기자재 도입은 관세를 면제한다. 기술지도도 공짜로 해준다. 외국시찰(그 당시는 하늘의 별따기)도 허가한다.

넷째, 수출목표를 달성하면 표창도 하고, 훈장도 준다.

▶ What : 어떤 상품을 수출하느냐? -수출 특화산업의 선정-

나는 "생산성본부에다 어떤 업종을 육성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술용역을 맡겼다.

선정기준으로 다음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1) 비교생산비가 낮을 것(우리나라에서 생산하는 것이 외국보다 유리한 업종, 주로 노동집약적인 품목).

(2) 외화가득률이 높을 것.

(3) 고용률이 높을 것.

(4) 수출실적이 크거나 또는 크게 증대되리라고 전망되는 것.

(5) 해외 시장성이 좋을 것.

한국생산성본부는 각 업종에 대한 지표를 작성하고 대한무역진흥공사와 시장성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이렇게 해서 다음 13개 품목이 선정되었다.

(1) 생사 및 견사

(2) 견직물

(3) 도자기제품

(4) 고무제품

(5) 라디오 및 전기기기

(6) 어패류 및 양송이통조림

(7) 모(毛)제품

(8) 합판

(9) 면직물

(10) 의류

(11) 피혁제품

(12) 공예품(갈포벽지 포함)

(13) 잡화류(양식기 및 가발).

이때 용역을 맡아 수고한 생산성본부 연구소장(백영훈(白永勳))과 이런 업종에 대한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의했다. '수출전략품목'이란 안도 나왔는데 특별히 중점 육성키로 정책화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맨 첫자와 맨 끝자만 따서 '특화(特化)'산업 혹은 특화품목이라 부르기로 했다.

(註: 그 후 이 말은 상용어가 되어 버렸다. 지금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특화(特化): 한나라의 산업구조나 수출구성에 있어서 특정사업 또는 상품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로 되어 있다. 잘 표현된 것 같다. 다만 1964년 이 용어를 만들 때는 앞으로 육성하겠다는 뜻에서 만들었는데 지금 국어사전에는 이미 완성된 단계를 표현하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 Who : 수출업체의 선정

수출은 거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전 국토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미 설명한 대로이다. 그렇다면 대기업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전국에 퍼져있는 중소기업도 적극 참여시켜야 한다.

필자는 공산품 수출액을 50% 증가시키는 안(결과적으로는 공산품 수출액의 3분기1을 중소기업이 담당한다는 안)을 수립했다. 우선 중소기업 500개 업체를 수출업체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1개 업체당 10만 달러이면 5,000억 달러, 1개 업체당 30만 달러를 수출한다면 1억 5,000만 달러이다.

이 정도면 당시로서는 꿈만 같은 액수이다. 물론 일시에 하자는 것이 아니라 3단계로 나누어 한 단계에 약 150개 업체씩을 선정키로 했다.

즉 수출전환의 단계별 육성정책이다. 이 안에는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모든 사항이 포함되었다. 돈도 도와준다. 달러이든 원화이든 말이다. 이자도 싸다. 수출용 원자재는 무제한 수입할 수 있다. 대부분 외상으로 가능하다. 기술지도나 경영지도도 해준다. 심지어 전기요금도 20% 할인해 주기로 했다. 수출업체로 전환해서 수출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지원책이었다.

때는 1964년 7월 중순, 내가 국장이 된 지 얼마 안되었을 때이다. 그 해 수출목표는 1억 2천만 달러, 이 목표는 기필코 달성해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다. 상공부 전체가 초비상 상태였다.

나는 이 안을 장관, 차관에게 브리핑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을 잘 활용해야 수출이 가능합니다. 즉 노동집약적 상품밖에 수출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급박한 수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발력이 있는 중소기업을 활용하는 길뿐입니다.

즉 1964년 하반기부터 1965년까지 1년 반 동안에 해야 될 긴급조치입니다. 1년반을 세 기간으로 나누어 3단계로 했습니다. 매 단계마다 150개 업체를 지정해서 모두 450개 업체를 수출업체로 전환시키자는 안입니다. 정부에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은 모두 포함시켰습니다."

모든 설명을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난 박충훈(朴忠勳) 장관이 "누가 지정을 하나?"하고 물었다.

나는 "업체 선정은 각 시도에 맡기겠습니다. 그 안을 가지고 최종적으로 공업국 각 담당과와 합의해서 결정하겠습니다. 중소기업 중앙회의 의견도 반영하겠습니다"고 보고했다.

박장관은 "그래 모든 지혜를 짜내도록 해. 그리고 업체 선정에는 잡음이 나지 않게 하라"면서 "문제는 돈이구만…"하고 말했다.

이때 동석했던 김정렴(金正濂) 차관이 말했다. "돈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박장관은 "그래, 김차관이 해결해 주면 되겠군. 될 수 있는 한 전액을 마련해 주시오"라고 지시했다.

김정렴 차관은 재무부 이재공화국 최고 선배로 장기영 부총리와는 각별한 관계이다. 이것으로 상공부 전략은 짜여졌다. 1964년 7월 24일, 경제각의가 열렸다. 나는 그 내용을 브리핑했다. 처음에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듣고 있던 장기영 부총리가 몸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는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열심히 듣기 시작하였다. 약 한시간이 소요되었다. 부총리는 "알았어, 하꼬방(판자집) 정리를 이런 식으로 하자는 거지" 하며 "오케이"했다. 장기영부총리는 중소기업육성에 대한 묘안이라고 판정했던 것이다(註: 하꼬방은 중소기업을 뜻한 말).

경제각의에서 통과되었으니 수출전환 3단계 육성계획은 정책적으로 확정된 것이고 이를 추진할 탄약, 즉 예산도 마련되었다(註: 1965년도 예산확보액 ― 1> 수출전환시설자금: 5억 5,600만원, 2>동운영자금: 3억원).

이제는 뛰어야 한다. 상공부는 업체선정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수출전환업체 신청공고를 했다.

1) 수출가능성이 있고, 수출전망이 좋은 품목을 생산하는 업체.

2) 외화가득률이 높고, 투자재원의 회수기간이 짧은 품목을 수출하고자 하는 업체.

3) 기존 시설을 가지고 있으며, 기존 시설의 활용도가 높은 업체.

8월 25일 마감 날까지 접수한 수는 461개 기업체였다. 즉시 각 시도 담당자 회의를 개최했다.

그 목적은 (1) 각 시도는 예비후보 공장의 실태조사를 할 것, (2) 각 시도 책임하에 업체선정을 할 것, (3) 각 시도는 업체 선정 후 수출에 대해 업체와 공동책임을 질 것 등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다.

각 시도는 실태파악을 한 후, 자신 없는 업체를 빼고 다른 업체를 선정하기도 했다. 중소기업 중앙회에서 자기 책임 하에 추천한 업체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1단계로 150개 업체를 초과한 167개 기업체가 확정되었다.

업체선정이 끝났고 이들 공장대문에 "수출품 생산 지정업체"라는 간판을 크게 달게 했다. 자부심부터 심어 주자는 뜻이다.

중요 국가시책으로 부상

박정희 대통령은 새해가 되면 공식 기자회견을 한다. 그 해의 정부 중요시책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1965년 1월 9일, 박대통령은 국가 중요시책 7가지를 설명했다. 그 중 한가지가 중소기업의 수출전환책이었다. 박대통령은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종래의 나열식 방법을 지양하고, 금년에는 300개 업체를 수출업체로 전환시키겠다."라며 이 정책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박대통령은 중소기업 육성에 대해서 항시 관심이 컸다. 중소기업 육성 자금도 많이 지원해 주었다. 그런데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가동률만 따지게 되니 숫자가 좋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개개업체의 가동률이 아니라, 전국 대기업 평균과 전국 중소기업 평균을 따지기 때문이다. 가동률이 좋아지면 중소기업 업체수는 자생적으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중소기업은 하루 사이에 없어졌다 생겼다 한다. 그래서 중소기업의 가동률은 대기업보다 항시 낮아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항상 돈이 모자라는 것이 바로 중소기업이다. 이것도 평균이기 때문이다. 건실한 중소기업이 있는 반면 폐업직전의 중소기업도 있으니 평균적으로는 항상 돈타령이 나오는 것이다. 중소기업 전체가 다 만족하는 정책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중소기업정책의 대상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소기업 수출전환정책에는 450개(65년도에는 300개)라는 대상이 명확했다. 군대식으로 공격목표가 뚜렷한 것이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만족한 것이다.

▶ where : 전국적인 조직망 구성 -중소기업 육성에 관한 청와대 최고 정책회의-

1965년 3월 2일, 청와대에서 중소기업 육성에 대한 최고 정책회의가 열렸다. 앞으로 중소기업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인가에 대해 담당국장인 필자가 브리핑하게 됐다. 중소기업육성책에 대한 브리핑은 처음 있었던 일이다.

- 수출산업 전환,

- 중소기업의 적정분야에서의 중점 육성,

- 공업의 지방분산과 공업단지화,

- 특화산업 및 성장산업의 육성,

- 중소기업 자금의 양적 증대와 공급의 원활화,

- 신용보완제도 확립,

- 수출품 검사제도의 강화,

- 중소기업 협동조합의 공동사업 조성 및 경영 합리화,

- 외국차관의 효율적인 활용 등이 주요항목이었다.

이 브리핑을 듣고 대통령은 두 가지 지시를 하였다. "브리핑한 내용을 기준으로 중소기업 육성시책을 강력히 추진하라. 전국의 지방장관에게 수출산업에 적극 지원토록 시달하라."그리고는 "지방 시도의 상공행정 담당기구를 강화해라.

상공과도 없는 도가 있으니 공업발전을 하겠는가. 서울, 부산, 경상북도에는 상공국을 신설하고 마산시, 대전시, 광주시에는 상공과를 설치하라." 수출전환 업체의 제1단계 선정 시도별(市道別) 일람표를 보고 내린 지시였다.

 


이 회의에서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획기적 정책결정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중소기업 육성이 본궤도에 올라간 계기가 이 회의에서 마련됐다. 그래서 이 회의를 '65년 3월 최고회의'라고 약칭한다.
1965년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육성사상 아주 중요한 해가 된다. 중소기업이 발전한다는 것은 고용이 늘어난다는 뜻과 같다.


이 회의에서 확정된 상공행정기구는 다음과 같다(<도표 6-7> 참조).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업의 수출전환」을 도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생산업자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는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진흥뿐. 그러니 온 국민은 수출전선에 적극참여 해야하고 수출전사에게는 성원을 보내자"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註: 1) 공업국 기술과 : 분야별 공업행정, 대기업에 대한 행정업무 담당
2) 공업연구소 : 기술자문 및 지도
3) 중소기업은행 : 중소기업육성자금 집행 및 경영 지도
중소기업은행장의 임명시에는 상공부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했으며 중소기업은행에 대한 업무감사권이 상공부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상공부와 중소기업은행의 협조는 잘 이루어졌다.
4) 중소기업단체로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가 있다. 그 산하에 전국조합(51개)와 전국연합회(13개)가 있는데 상공부장관(중소기업과)의 감독을 받게 돼있다. 지방에는 전국연합회 산하의 업종별 지방조합(102개)이 있는데 각 시도의 감독을 받는다.
5) 각 시도의 상공국(과)의 행정업무는 그 내용에 따라 상공부의 기술과 또는 중소기업과의 지휘를 받는다.

지방장관 수출전선에 뛰어들다

새로운 상공담당 행정기구는 1965년 3월 2일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각 시도에는 상공분야를 담당하는 부서가 없었다. 즉 당시 지방도청에는 내무(內務)나 농림(農林)에 관한 행정사무는 있으되 상공에 관한 업무는 없었다. 도지사나 지방관리는 상경시 내무부나 농림부에는 들렀으나 상공부에는 둘러볼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지방은 이때까지 조선조시대와 똑같이 사농(공상)시대였다는 뜻이다. 그런데 65년 3월 2일 회의 때 각 시도에 상공국이나 상공과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업무가 부여됐다.

첫 번째 지시가 수출전환업체의 선정권이다.

1965년 상반기에 제2단계로 183개 업체를 선정했고 1965년 하반기, 즉 제3단계에서는 192개가 선정되었다. 모두 합치면 542개 업체가 되었다. 당초 450개 업체를 목표로 했는데 542개 업체로 증가된 것이다.

수출을 하겠다는 업체이며 각 시도에서 책임진다는 업체이다. 수가 많아서 나쁠 것은 없으나 더 늘리지는 않기로 했다. 우선 542개 업체를 대상으로 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중 탈락하는 업체도 생길 것이다(<도표 6-8> 참조).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업의 수출전환」을 도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생산업자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는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진흥뿐. 그러니 온 국민은 수출전선에 적극참여 해야하고 수출전사에게는 성원을 보내자"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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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별 업체수 분포상황을 보면 서울, 부산, 경남북, 경기가 459개로 85%를 차지한다. 섬유공업이 발전된 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공업 육성에 있어서는 충남북, 전남북에 대해서 주력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 발전에 있어 균형발전이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방침은 지방공업 육성책에 반영되어 나갔다.

이들 업체에 대한 육성책임과 수출책임도 지방장관에게 부여됐다. 업체별, 연도별, 월별 수출계획서를 작성토록 하고 매월 실적을 보고토록 했다. 소위 체크 시스템이다. 이렇게 되면 각 시도마다 실적이 나온다. 이 보고는 연말통계로 작성해서 청와대에 보고하게 된다. 그래서 각 시도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시장·도지사가 직접 관심을 갖고 뛰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그때 보고서의 예를 소개한다. 1966년 7월분 보고서이다.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와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공업의 수출전환」을 도모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생산업자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에게는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진흥뿐. 그러니 온 국민은 수출전선에 적극참여 해야하고 수출전사에게는 성원을 보내자"는 신념을 심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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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도 수출목표는 5천만 달러이다. 지정업체수가 542개이니 한 업체당 평균 9만 2천 달러로 10만 달러도 안 된다. 그러나 5천만 달러라고 하면 1966년도로서는 큰 액수이다.

그 해 수출목표는 2억 5천만 달러, 그 중 공산품은 1억 5,872만 달러이다. 그 중 5천만 달러라면 3분의 1을 이들 중소기업체가 담당하는 것이다.

위의 표를 보면 7월에는 489만 달러를 수출했다. 원래 수출은 전반기보다 후반기에 많아진다. 특히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수출이 늘어난다. 연말자금 마련 때문이다.

7월에 489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이 액수를 한달 평균으로 계산하면 연간 5,900만 달러, 약 6천만 달러이다. 지금 당시의 자료를 구하지 못해 상세한 숫자는 모르지만, 이런 경향을 보면 이들 업체는 그 해 6천만 달러를 훨씬 초과하는 수출을 했을 것이다.

1967년에는 ―714개로 늘어난 수출전환업체가 ― 9,161만 달러를 수출했다. 1967년의 수출은 3억5,829만 달러, 이중 공산품수출은 70%인 2억5,117만 달러. 이 공산품 수출 중 36.5%(9,161만 달러 ÷ 2억5,117만 달러)를 이들 수출전환업체가 담당한 것이다.

1968년의 계획을 보면 수출목표 5억 달러, 이중 공산품의 수출은 76.5%인 3억8,245만 달러. 이중 34%인 1억3,000만 달러를 수출전환업체가 담당하도록 돼있다. 이때(1968년) 수출전환업체수는 일부가 변경돼서 703개 업체가 됐으니 업체당 평균수출액수는 약 20만 달러이다. 앞으로 2~3년 내에 업체당 40만 달러를 수출한다면 수출전환업체는 3억 달러를 수출할 수 있다.

우리나라 수출의 한계치라고 하던 3억 달러를 수출전환업체의 힘만으로 1970년대가 되기 전에 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소기업의 '빽'은 나(朴 대통령)야

중소기업 육성책이 본 궤도에 올랐을 때 박 대통령도 참석한 파티에서 중소기업중앙회 회장(김봉재)이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각하 감사합니다. 중소기업을 위해서 강력한 지원을 해주신 데 대해 중소기업체를 대표해서 감사를 올립니다. 요즈음 중소기업계는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하고 말하자, 朴 대통령은 환하게 웃으며 "김 회장, 과거 중소기업은 죽을 때 '빽'하고 죽었다며." (註: '빽'이란 배경, 즉 밀어주는 사람이란 말로 배경이 없어 쓰러질 때 '빽'하고 죽는다는 표현이 당시 유행했다.) 朴 대통령은 이어서 "이제 중소기업의 '빽'은 나야. 대통령이야.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빽'을 가진 사람은 중소기업자야"라고 했다고 한다. 그 후 김 회장은 "내 '빽'은 대통령이야" 하고 다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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