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남부두에서 부모와 함께 피난민 대열에 끼어 탈출하려다가 동생을 잃어버린 아픈 과거는, 잃어버린 딸을 찾으러 피난길조차 거부했던 아버지에 대한 효심과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무한책임이 진하게 녹아 있는 회한(悔恨)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이자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영화 전반부에 등장하는 1950년 12월, 당시의 흥남부두에는 후퇴하는 미군의 군함에 탑승하기 위해 몰려든 피난민들이 적어도 10만 여명 이상에 달했을 만큼, 흥남시 외곽에는 중공군 4개 사단 12만 명이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정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철수할 미군과 유엔군 병력만 해도 10만 5천명이나 되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놓여 있었던 피난민 앞에 보이는 탈출구란 오직 화물선 한 척밖에 보이지 않았다. 철수작전의 마지막 배는 정원 2천여 명에 불과한 운명의 수송선, 바로 '매디리스 빅토리아호' 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찾아 탈출을 꽤하는 피난민들을 하늘은 결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배위에는 철수작전을 지휘하는 미군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해병대 문관 통역관으로 참전한 현봉학이라는 의학도(醫學徒)였던 애국청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중공군의 공격에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장군님 제발 불쌍한 우리 국민들을 살려주세요."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했던 유학생 출신 청년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들을 미군 배에 태워달라고 영어로 간절하게 호소했다. 알몬드 장군은 한참을 생각했다. 자유를 찾아 아우성치는 피난민들의 절규가 알몬드 장군의 눈과 귀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알몬드 장군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모든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워라!"는 장군의 이 한마디의 명령에 의해, 윤덕수의 가족 일행도 피난행렬에 함께할 수가 있었다.
이때 바다에 버린 장비는 200톤이 넘는 탄약과 500여개의 포탄, 200드럼 분량의 유류와 차량들이었고 장비를 내다버린 그 빈자리에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빼곡하게 태우고 흥남부두에서 마지막으로 출항했다. 이날이 1950년 12월24일, 성탄절 이브 날이었다. 후일 전쟁사가(史家)들은 이 작전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비록 아버지와 여동생과는 헤어졌지만 어머니, 그리고 나머지 동생들과 함께 무사히 피난길에 오른 윤덕수의 인생 제2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으로 무사히 도착한 윤덕수 가족은 이제 막 장터가 마련되기 시작한 오늘날의 국제시장을 찾아 고모와 해후를 하게 된다.
윤덕수에게는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말이 자신의 운명이자 자신의 인생사가 될 것임을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흥남 철수작전에서 아버지가 남겨준 마지막 발언은 "덕수야. 너는 이제부터 가정을 책임진 가장이다. 가장이 해야 할 일은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 말은 윤덕수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 한시도 잊지 않고 충실하게 이행하는 삶의 기준이자 철학이 되었다. 윤덕수의 인생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진 가장의 역할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온 국민 전체가 가난했던 그 시절, 윤덕수는 결코 다른 길로 벗어남이 없이 오직 근면함과 성실함 그 자체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간다. 윤덕수에게는 진정한 남자의 우정과 의리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죽마고우 달구도 있었다. 달구의 권유에 따라 동생의 대학공부를 시키기 위해 독일 탄광으로 자원해 떠나는 윤덕수에게는 오직 긍정의 힘만이 지배하고 있었고 독일 광부생활을 마감한 열매로 어렵게 집을 장만한 장면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안겨주는 무기가 되었다. 광부생활 도중에는 파독 간호사 영자를 만나 후일 백년해로를 이어간다.
부산으로 귀국한 덕수는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합격증을 받아 들었지만 여동생의 결혼과 남동생의 공부를 위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기로 결심하고 해양대학교 입학을 포기한다. 덕수의 대학진학 포기는 그 당시 가족의 부양을 책임진 모든 가장들의 공통점이 되기도 했고, 가족의 부양을 책임진 가장만이 가져야하는 시대의 아픔이기도 했다. 고모가 운영하던 꽃분이네 가게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운명에 직면하자 윤덕수는 가게 인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월남전이 한창이던 베트남에 달구와 함께 건설현장의 인부로 가기위해 면접장에서 애국가를 열심히 제창하여 끝내 베트남 행에 승선하게 되었고 대한상사 직원으로 파견해서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면서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안전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로 가족들을 안심시키는 윤덕수의 가족에 대한 무한책임 앞에서는 그 시대를 살아왔던 모든 아버지의 아픔을 대신 해주는 인고(忍苦)의 대명사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 시대 아버지의 모두가 그랬듯, 가족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엄한 가장이었지만, 가슴속에는 언제나 가족만을 생각하는 가장 인간적인 면을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도 오직 자신의 의지를 단 한시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면서 가난과 싸워왔던 그 시대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역만리에 떨어진 타국의 지하 속, 수 킬로미터 깊이의 채광 굴도 마다하지 않았고, 시체를 세척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죽음도 불사하고 생활전선의 최전방에서 목숨의 안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모두가 가족을 책임진 가장의 의무를 져 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아버지 어머니들의 희생으로 오늘날 까지 왔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시내 번화가는 형형색색의 온갖 휘황찬란한 네온트리가 다운타운을 뒤덮고 있다. 좋은 신발에,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은 아직도 이 땅에서 생존하고 있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손발이 부릅터 가면서 일구어 놓은 열매들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고난이 닥칠 때 마다 언제나 애국가를 유행가처럼 불렀고 태극기는 아버지의 가슴에 손을 얹어야 하는 살아있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오늘날과 같이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발전을 이룩한 배경에는 자신의 인생사를 책임져 왔던 수십만, 수백만의 아버지 윤덕수가 아직도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풍요한 물질과 발달된 사회에 사는 젊은 세대는 국제시장에서 탄생한 이 시대의 수많은 아버지들인 윤덕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윤덕수는 자식으로 부터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가슴속에는 언제나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 가득했고 고난의 세월과 질곡의 인생사를 오직 가슴속에서만 삭였으면서도 눈물만은 결코 보이지 않는 시대의 굳센 아버지의 자화상이었다. 연말연시를 맞아 젊은 세대들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국제시장을 꼭 한번 찾아보기를 권해 주고 싶다. 국제시장에 가면 그 시대의 아버지였던 윤덕수의 파란만장한 생생한 일대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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