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허, 허롭게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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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허, 허롭게 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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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159>이진명 "백양사역"

백양사역은 새마을호는 안 간다
백양사역은 새마을호는 안 온다
빠르고 비싼 것은 백양사역 못 선다 못 밟는다

백양사역은 내리는 사람 나를 포함해 두셋 또는 셋넷
백양사역은 타는 사람 나를 포함해 둘 또는 셋

그런 몇번째 날
초봄 찬 눈발 옅게 흩는 날
잔광도 구름에 다 가린 늦은 오후
상행길 홈
백양사역은 휘, 휘
허, 허롭게 허, 허하게
오직 나 혼자를 세웠다
오직 나 혼자를 손님으로 받았다
여행가방을 늘여들고
아직 길다란 옷을 벗지 못한 나를

그때 나는
열차가 들어오려는 2, 3분의 짧은 사이를 기다린 것이겠지만
더욱 기다리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귀기울이고 싶었던 것은
그래서 마음 깊이 보고 싶었던 것은
넓디넓고 조용한 백양사역의 모든 것
특히 사람의 그림자를 지운 백양사역의 본래 얼굴
낮고 흐린 채색으로 무한히 정지한 듯 열린

건너 커단 산봉우리 멀고
서울도 멀고
장성호 지나지나 다녀온 古佛(고불)의 백양사도 이젠 멀고

간섭은 없다
백양사역은 그처럼 조용하고 넓은 채, 무슨 놀라는 일도 다 그친 채
강산의 무량한 적막이 되어

나는 서서 밟는다 짧은 2, 3분 사이
느리고 헐한 이 모든 노래를
길에서 벗어난 길의 사이 백양사역을 벽이 넘어온다

 

 
   
  ^^^▲ 철로
ⓒ 이종찬^^^
 
 

봄비 추적추적 서럽게 내리는 날, 아니 "초봄 찬 눈발 옅게 흩는 날/ 잔광도 구름에 다 가린 늦은 오후", 낯 선 시골 간이역에 호올로 서서 몇 시간 만에 한대씩 오래된 기억처럼 다가오는 십이열차를 바라본 일이 있는가.

저만치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요란한 기적소리를 울리며 다가오는 십이열차. 목이 길어지게 기다려온 그리운 사람의 실루엣처럼 긴 꼬리를 가물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십이열차. 마치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탓에 힘들었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다가오는 십이열차.

늘 도시내음 물씬 나는 사람 서넛 내리고, 흙내음 물씬 풍기는 사람 서넛 타지만, 어떤 때는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하나 없는 십이열차. 마음 시린 나를 태우고 세상 저만치 툭, 던져 놓았다가 다시 나를 태우고 또다른 세상을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는 십이열차.

아, 그 십이열차가 닿았던 그 간이역이 결국 내가 그렇게 애달프게 찾아 헤매던 그리움의 끝자락이었단 말인가. 그 십이열차가 나를 떨군 그 간이역 주변에 있는 그 오래된 사찰이 내가 전생에 머물렀던 그런 곳이란 말인가. 봄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간혹 봄비 사이로 찬 눈발 몇 점 눈물방울처럼 떨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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