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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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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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를 잃으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의약분업 이후 항생제 처방율과 주사제 처방율이 줄었다는 결과가 나왔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동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국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의약분업을 실시하고 있는 주된 이유가 약의 오남용을 남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의약분업으로 처방전을 통해 약의 내용이 환자와 약사에게 공개됨으로써 자신이 먹는 약에 무슨 성분이 들어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됨으로써, 꼭 필요하지 않는 데도 항생제를 사용하는 관행을 줄이는 것이 큰 목표였기 때문이다. 또 정확한 진찰을 거치지 않은 채 약국에서 항생제나 호르몬제를 함부로 사서 복용하는 것을 막게 된 것도 의약분업의 큰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의 궁금한 생각이 든다. 그런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꼭 의약분업밖에 없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의약분업을 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도 의약분업을 해야만 의료분야의 선진국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의사들과 약사들이 스스로 항생제와 주사제의 사용을 줄일 수만 있었다면, 그리고 국민들이 의사나 약사가 약물의 오남용을 하도록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빨리 낫기를 원하는’ 관행을 막을 수만 있었다면 굳이 의약분업을 시행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동일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항생제와 주사제의 사용이 줄어듦으로써 의약분업이 약물의 오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임이 입증이 되었다. 그러나 의약분업 외에는 같은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의약분업은 엄청난 고비용을 요구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의약분업 전에는 약국에서 간단하게 약을 사먹거나, 병의원에서 진료비만 지불하고 처방을 받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의사에게 진찰비를 지불하고 다시 약사에게 조제비를 이중으로 지불해야 하게 되었다. 또 처방이 공개됨에 따라 의사들이 유명메이커의 비싼 약을 처방하기를 선호하게 됨으로써 항생제와 주사제를 적게 사용해도 약제비가 줄어들지는 않은 것이다.

그 결과는 국민들의 의료비용의 증가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과 동일한 의료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더 많은 본인부담금을 지불해야 하게 되었고, 건강보험료도 더 많이 지불해야하게 되었다. 그래도 건강보험재정이 모자라서 전보다 보험혜택을 받는 내용이 오히려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뢰에 의해 항생제와 주사제를 줄이는 방법 대신에, 제도적 강제에 의해서 목적을 이루려고 한 때문이다. 즉 신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게 된 사회적 비용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뢰의 가격이다.

부안군에서 핵폐기물에 대한 반대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핵폐기물의 안전성 문제를 떠나서 정부가 이 문제를 좀 더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다루었으면 최소한 지금과 같은 정도의 심각한 전면적인 저항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로 정부가 부안군민들의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더 오랜 시간동안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 역시 신뢰를 상실한 때문에 나타난 신뢰의 비용으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유명브랜드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 제품의 이미지와 함께, 브랜드에 포함된 신뢰를 사기 때문이다.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해야 하긴 하지만, 그 브랜드가 보장하는 신뢰의 가격을 계산하면 브랜드 제품을 사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같은 질을 가진 덜 유명한 제품들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형성된다면, 알뜰한 소비자들은 싼 가격의 동일한 품질을 가진 제품을 구매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신뢰를 얻기 때문에 생기는 신뢰의 긍정적인 효과일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길거리에는 어김없이 구세군의 빨간 모금함이 등장한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그 모금을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고 매년 돈을 넣는 사람들이 있다. 나같이 정부나 방송국에서 시행하는 수재의연금 모금행사에는 돈을 내지 않는 사람도 구세군의 자선냄비에는 꼬박꼬박 돈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구세군은 믿을 수 있다’라는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세군은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신뢰를 주고 있기 때문에, 신문광고나 TV광고가 없이도 자선냄비에 차곡차곡 쌓이는 돈으로 각종 구제사업들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신뢰의 결과이다.

제일 나쁜 직업에 1등으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대의정치를 하는 국가에서 자신들이 뽑은 정치인을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아리러니가 생기는 것이다. 그들이 그동안 보여 온 행적들이 신뢰를 잃기에 충분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명예로워야 마땅할 신분이 ‘필요악’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바로 그들과 그들의 선배정치인들이 보여준 신뢰상실의 결과이다.

정치든, 사회운동이든, 상품이든, 사회정책이든 신뢰를 잃게 되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결국 국민들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한된 사회적 자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뢰의 상실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신뢰의 상실로 인한 비용이 발생하면 할수록, 그만큼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작금의 부안군 사태는 그래서 부안군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손실이고 우리들 모두가 함께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다. 그렇기에 문제를 이렇게 이끌고 나간 정책당사자들은, 부안군민들뿐 아니라 모든 국민들 앞에 깊이 사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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