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자주의와 강대국들의 경쟁이 무엇인지를 조명해 주는 중부 회랑 국가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세계는 ‘단극체제’에서 이제 ‘다극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동안 강대국에만 집중되었던 국제 정세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
세계는 단 하나의 극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지속적이고 조용한 권력의 재분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중앙아시아만큼 눈에 띄고 놀라운 곳은 없다.
오랫동안 강대국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던 중앙아시아, 즉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은 체스판, 비행 금지 구역, 주변부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중앙아시아는 완전히 다른 모습, 즉 “권리를 가진 중견국들의 집합체”로 변모하고 있다고 에릭 루덴샤일드(Eric Rudenshiold) 박사는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 시절 4년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중앙아시아 담당 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카스피안 정책 센터(Caspian Policy Center) 워싱턴 사무소의 선임 연구원인 에릭 루덴샤일드 박사는 10월 24일자 ‘더 내셔널 인터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중앙아시아 중견국들의 부상은 ‘강대국 경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지역의 5개국은 각자의 방식으로 지역 역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더 이상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의 이익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거나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양자 간 협력적 지역 의제를 추구한다.
* 성장의 중앙아시아
루덴샤일드는 “이 지역의 각 국가는 워싱턴, 모스크바, 베이징, 브뤼셀, 앙카라, 테헤란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수도들과 열린 소통 채널을 유지하는 일종의 ‘다중 벡터 외교’(multi-vector diplomacy)를 실천하고 있으며, 이들은 사이버 연결, 안보, 수자원 관리, 환경 안보 등 중요한 지역 현안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정기적으로 포럼을 개최하고, 이들은 스스로를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한다”고 진단했다.
‘다중 벡터 외교’는 “여러 단계를 거치고, 여러 기법을 활용하며, 회피 전략을 사용하는 조직적인 외교”를 말하는데, 이 외교의 목적은 두 가지로 ‘보안을 교란’시키는 동시에 ‘의도한 대상을 정확하게 조준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두 번째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그에 따른 국제 제재 체제는 러시아 영토를 통과하는 북부 교통로에 대한 중앙아시아의 접근을 사실상 차단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의 무역이 상당 부분 차질을 빚었다. 이로 인한 경제적 혼란은 중앙아시아 지도자들이 다윈주의적 결정을 내리고, 무역 전략을 재조정하고, 외교 전략을 수정하도록 강요했다.
중앙아시아 5개국과 아제르바이잔, 조지아는 대체 무역로를 신속하게 개발하고, 인프라를 개선하며, 화물 운송을 가속화하기 위한 협력 체계를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탄생한 중부 회랑(Middle Corridor)은 중앙아시아, 카스피해, 코카서스를 거쳐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카스피해 횡단 노선(Trans-Caspian route)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 중부 회랑 인프라는 전략적 산물
4년 전 물류 조정으로 시작된 것이 이제는 전략적 방향 전환으로 이어졌다. 이제 카스피해와 흑해를 잇는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에 있는 에너지 및 교통 허브(transport hub)로 부상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수도들은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이점을 활용하여, 지역 교통망을 장악하고 나아가 광활한 대초원의 경제를 장악하려는 주요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역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중부 회랑을 통해 세계 시장에 직접 접근함으로써, 이 지역 경제는 독립적인 공급망과 경제 현실을 구축하고 있다. 즉, 베이징과 모스크바와 일부 거래를 하긴 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취약한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새로운 경쟁의 중재자로 인식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남(南) 코카서스 이웃 국가인 미국, 유럽, 그리고 튀르키예(옛. 터키)와 협력하여 관세 개혁을 조율하고, 항만 건설을 추진하며, 무역 흐름을 디지털화하고, 유럽 및 인도-태평양 지역과 직접 연결해 왔다.
중부 회랑은 더 이상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다. 주권의 회랑(corridor of sovereignty)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중견국들이 인프라를 전략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시장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국제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아스타나, 타슈켄트, 그리고 이 지역의 다른 수도들은 연결성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 에릭 루덴샤일드의 견해이다.
* 하나의 블록에서 웹(web)으로 진화
이 놀라운 반전은 ‘다자주의’의 더 광범위한 진화를 반영한다. 수십 년 동안 국제 협력은 강대국이 중심이 되고 다른 국가들이 바퀴살처럼 움직이는 하나의 바퀴로 가장 잘 설명되었다.
오늘날 영향력, 권위, 그리고 권력이 더욱 수평적으로 흐르면서 그러한 구조는 변화하고 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유럽 연합, 그리고 전 세계가 관계 재편을 겪으면서 형성된 공백 속에서, 중견국들 사이에는 전통적인 관계를 깨뜨리는 긴밀하고 중복되는 파트너십이 형성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이제 바퀴가 아닌 거미줄(web)처럼 얽힌 그물망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규모의 집중적인 국가 간 파트너십의 확산은 실용적이고 유연하며 상황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세계 관계를 반영한다. 이는 ‘블록’(blocs)보다는 균형 잡힌 네트워크의 중요성이 더 크다. 중앙아시아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앙아시아는 다양한 국가와 개별적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협력 프레임워크(예: C5+1)를 통해 전통적인 다자주의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고유한 협정과 메커니즘을 구축했다. 이러한 프레임워크는 파트너십의 균형을 이루고 동맹과 무역을 다각화하기 위해 지역 지도자들을 전 세계 동료들과 직접 연결하는 탄탄한 정상회담의 뒷받침을 받는다.
* 변화의 실험실
투르크 국가기구(OTS : 튀르키예계-튀르키예어 사용-국가 간 포괄적 협력 기구) 회원국으로서 중앙아시아는 문화 외교와 무역을 통해 서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지역 협력은 여전히 다양한 협력 플랫폼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지만, 상하이협력기구(SCO)와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아시아의 참여는 모스크바나 베이징의 이익뿐 아니라 지역 자체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을 대가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아시아는 강대국 정치의 주변부가 아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로의 도약은 다자주의의 미래를 위한 실험실이 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정치 환경에는 희망과 위험이 공존하는 법이다. 중앙아시아 바로 서쪽, 남(南) 코카서스 지역에서 오늘날 진정한 과제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이후 지속 가능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Nagorno-Karabakh conflict)은 러시아 평화유지군이든 서방의 중재자든 외부 세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임을 보여주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외부 개입을 대체로 피하면서, 서로 타협하여 각자의 역할을 통해 지속적인 안정을 확보하고자 했다.
중앙아시아에도 같은 교훈이 적용된다. 참정권을 얻은 중견국들은 분쟁을 관리하고, 협력하며, 새로운 불안정 요인을 예방해야 하는 새로운 책임을 떠안게 된다. 그들의 주권은 강대국 간의 균형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균형을 통해서도 강화된다.
* 중앙아시아의 다극화 패치워크(Patchwork)
이러한 지역적 참정권 확대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펼쳐지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이다. 아시아 대륙 전역에서 우리는 한국, 인도,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그리고 이제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까지 중견국들이 서로 헤지하고, 균형을 맞추고, 혁신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각 국가는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며, 어느 누구도 편을 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다극화된 아시아가 어떤 모습일지, 즉 ‘충성의 축’(axis of allegiance)이 아닌, 즉 강대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복속되지 않고 주권 국가로서의 자주성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여러 주체(국가)들이 모여 이루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과도한 전략적 자율성은 다극화는 하되 다자주의는 없는 환경을 조성할 위험이 있다. 공동의 규칙 없이 붐비고 경쟁적인 이웃 국가들의 집단을 상상해 보라. 이 점에서 중앙아시아는 국가들이 다방향 외교가 원칙에 따라 마비되지 않고, 고립 없이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을 제시한다.
마치 ‘한 지붕 여러 가족’처럼 ‘같이 또 따로’(In the same roof, they will be together and/or separately)라는 어지만 팽팽하게 질서를 유지하는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 변화하는 질서를 위한 네 가지 교훈
북미, 유럽, 동아시아 및 기타 주요 글로벌 기관에 오랫동안 익숙한 국가들에게 중앙아시아와 같은 중견국을 이해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네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오랜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는 세계 경쟁의 양상을 점점 더 좌우할 중간 행위자 계층(class of middle actors)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둘째, 중견국들은 지시가 아닌 대화를 통해 참여해야 한다. C5+1이나 EU의 글로벌 게이트웨이와 같은 파트너십은 현지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파트너십을 구축할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
셋째, 연결성은 전략으로 다뤄져야 한다. 철도, 항만, 디지털 회랑은 기술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국정 운영의 새로운 도구이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이제는 봉쇄적 사고(containment thinking)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다. 중앙아시아의 부상은 단순히 중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견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세계 중부 지역에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봉쇄적 사고”는 과거 소련 등 공산권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군사적·정치적·경제적 지원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략적 사고를 말한다. 오늘날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을 견제한다며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수단을 통해 견제하려는 것 역시 ‘봉쇄적 사고’이다.
위의 4가지를 통해 중견국들이 더 이상 스스로를 강대국과의 경쟁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스스로 만든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 인식과 함께, 강대국에서 상당한 영향력과 주요 경제력을 갖춘 국가, 그리고 종종 더 큰 행동 유연성을 갖춘 국가로의 실질적인 행위 주체 재균형이 이루어진다. 중앙아시아가 이러한 집단으로 부상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수요가 높은 전략적 광물과 희토류(REM)의 방대한 매장량, 그리고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 힘없는 피해자에서 동맹의 창시자로
네트워크, 파트너십, 그리고 새롭게 구축된 신뢰를 통해 오늘날의 권력을 강화하는 전략적 참정권 시대(age of strategic enfranchisement)에 접어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견국, 특히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미래 질서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들은 실용성을 유지할 만큼 작지만,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큰 국가이다. 이들은 경쟁의 희생자가 아니라, 협력의 주체로서 여러 중심이 존재하는 세상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들의 부상은 강대국 간의 경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에서 카스피해로, 카스피해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하고, 확산되고, 평평해지고 있다. 이제 과제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다자주의를 수용하는 것이다. 과거의 강대국뿐만 아니라 미래의 중견국도 인정하는 다자주의이다.
그런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세계를 악의 소굴로 빠져들게 하는 극단적 단극주의자(an extreme unipolarist, In the whole universe, only I exist)라할 수 있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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