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년간 추진해 온 워커장군기념관(GWMH)이 마침내 착공을 앞두고 있다. 필자가 재직 중이던 국립 부경대학교에는 낙동강전선의 영웅이자 한미동맹의 상징인 워커장군(Gen. Walton H. Walker)의 원혼이 서린 워커하우스가 있다. 워커하우스는 1950년 8월 낙동강전선이 앞을 알 수 없는 긴박함에 대구에 있던 유엔지상군사령부(일명 워커캠프)를 부산에 이동시킨 역사적 유적이다.
경비행기와 짚차로 낙동강전선을 누볐던 용장이자 지장이었던 워커장군은 전장의 최후 지휘수단인 무선시설의 안전을 위해 미군에 의해 수용된 부경대학교(당시 수산대학교)에 전쟁지휘소를 이전했던 것이다. 당시의 기록에는 긴급요청에 샌프란시스코에 원형이 있는 석축콘크리트 건물을 2주만에 완성한 것으로 나온다.
바닷가에 위치한 부경대학(당시 수산대학)은 유일한 고등교육기관이자 인근에 수영비행장과 항만과 연계하여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워커캠프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인근에 유엔군묘지도 뒤따르게 된다.
민족의 운명이 달린 낙동강전선의 최고 절정에 긴급조성된 워커캠프는 18일동안 유엔지상군사령부로 역할을 한다. 인민군의 마지막 공세를 막아내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진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진과정에서 워커장군은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장군과 부딪힌다.
최단기일에 북진을 완료하려는 맥아더사령관에 반해 계절과 중공군개입의 변수로 신중한 스탠스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의 특성상 총사령관의 의지가 관철되었고 맥아더장군은 최악의 결정으로 군신에서 최악의 사령관으로 전락한다.
양차(1,2차) 세계대전의 영웅은 낙동강전선이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는 한국을 죽을때까지 지키기위해 후퇴하지 않겠다(I will stay here to protect Korea until my death.)"라는 사자후를 한미장병들에게 토한 워커장군은 남북 150Km, 동서 90Km의 낙동강전선을 구축하고 참호전(육군, 국군)과 기동전(공군,해병대)을 결합하고 "stand or die"를 최후명령으로 하달했다.
용기와 전략이 탁월했던 워커장군은 북진에 앞서 매서운 북쪽의 겨울과 중소를 국경으로 가진 한반도의 지정학을 통찰했던 것이다. 워커장군은 일본에 주둔하면서 동북지역의 매서운 겨울과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이북지역의 경험을 들었던 것이다. 북진 직후 미군은 위도와 다른 대륙성 기후와 중공군의 대규모 공습에 패퇴를 거듭하게 된다.
무리한 상륙작전과 가혹한 추위에 노출되었던 동부전선과 달리 적정 순찰을 강화하고 신속한 후퇴로 전력을 유지한 서부전선을 책임진 워커장군이 수도권 방어작전을 지휘하던 중 전사하여 한국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
안타까운 것은, 특히 민주화 이후 한국인들이 전쟁과 영웅을 잊은 점이다. 무엇보다 연이은 종북정권의 수립으로 미군훈령중 여중생희생 등이 부각되고 반미운동이 자리잡게된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워커장군기념관 건립과 같은 역사와 감사, 동맹과 국제연대, 자유와 전쟁을 결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워커하우스는 유엔묘지와 함께 '한강의 기적'과도 직결되는 역사의 에피소드가 깃든 것이다. 정주영 회장(현대)은 유엔묘지의 겨울 녹화 뿐 아니라 워커하우스 건설로 미군 공사를 맡게 되어 전시에도 성공신화를 만들고 후일 '한강의 기적'의 영웅이 된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워커장군의 외아들 샘 워커대위는 월남전에서 한국군과 함께 공산주의와 싸운 것이다.
워커장군기념관은 앞으로 지역과 나라를 넘어 국제적 명소가 될 것이다. 부산은 낙동강전선의 구국도시에서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도시로 성장했다. 민주화에도 앞장선 도시는 참전군인들의 고향이기도 하며, 세계로 향하는 관문이자 Expo를 유치하려는 미래 도시이다. 이순신 장군, 이승만·박정희 대통령의 원혼이 깃든 도시가 이제 워커장군의 도시이자 한미동맹과 유엔의 도시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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