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5년 대한민국 역사에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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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5년 대한민국 역사에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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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사태와 위수령 발동

^^^▲ 굴욕외교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흙묻은 대형 "태극기"를 앞에 펼처들고 시위에 나서고 있다
ⓒ 한국기자연대 조동옥 기자^^^
학원사태

1965년 8월 20일, 오전 경희대학생 2천 여명은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를 외치며 시내로 뛰쳐나와 데모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았으며 학생들은 투석으로 경찰에 맞섰다.

부산 동아대생 2천 여명도 "한일협정 비준 무효" "국회 해산" 등의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감행, 최루탄을 발사하며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했다.

8월 21일, 서울 문리대, 법대, 한양대, 동국대학생 등은 한일협정 무효를 외치며 데모와 성토대회를 열었다.

곳곳에서 경찰과 학생들은 충돌했으며 경찰은 경희대 총학생회장을 구속했고 서울 법대는 법대 학생회장을 퇴학 처분했다. 8월 23일, 학생들의 데모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당국의 강력한 저지와 맞섰다.

서울 법대생들은 학생회장의 퇴학 처분에 대한 논의 후 학생회장의 복적과 학장의 퇴임을 요구하며 무기 맹휴에 들어갔다. 8월 24일, 정부는 불법 데모는 엄단할 것이며 주모자와 난동자는 전원 구속한다는 강경 방침을 밝혔다.

학생 데모가 나흘째로 접어든 이날 데모 저지에 무장 군인이 출동했고 구속 학생은 늘어났으며, 학생 데모는 전국적으로 퍼졌다. 8월 25일 마침내 무장 군인 500여명이 1시 30분경 고려대학 교정에 진입해 데모 저지에 나섰다.

위수령 발동

8월 26일, 박 대통령의 학원사태에 대한 강경한 담화문이 발표되고 정부는 마침내 위수령을 발동, 서울 근교 야전군 예하 6사단 일부 병력을 서울에 투입, 학생 데모 저지에 나섰다. 군 출동에도 데모는 끊이지 않고 연일 계속 되었다.

특히 교대생과 교수들은 무장 군인의 고대 난입에 대해 강경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반면 정부는 학생들의 데모가 계속될 경우, 보다 강경한 4단계 행정조처를 취할 것이라고 강력히 경고했으며 서울대의 각 단과대 학장들은 비상사태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장 군인 학원난입과 박 대통령의 특별 담화"를 규탄하는 성토 대회를 열었고, 대학가의 징계바람에도 불구하고 학생데모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8월 28일, 정부는 데모 주동학생과 배후조종자 등에 대하여 일제 검거에 착수, 강경 대책을 펴나갔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교가 임시 휴교에 들어가 태풍의 정적이 학원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학원가에는 데모 학생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고 마침내 9월 4일 정부는 연대와 고대에 대해 데모 요인이 제거될 때까지 무기 휴업령을 내렸다.

권오병 문교장관은 "연세, 고려 두 대학은 학생 데모를 주동한 학생과 이를 선동한 교수를 자율적으로 처리하기를 기다리고 명단까지 작성해 주었는데 이를 처벌치 않아 데모의 요인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이 요인이 제거될 때까지 무기한 휴업할 것이라고"방침을 밝혔다.

이어 소위 "정치교수"들의 학원에서의 추방, 데모주동 학생들의 계속 검거 등 정부의 강경한 방침이 계속 집행되어 불행한 학원사태의 역사가 기록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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