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과 미국은 혈맹관계이다
스크롤 이동 상태바
대한민국과 미국은 혈맹관계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미관계는 세계 질서의 축이자 한민족의 운명과 함께한 것이다

▲ ⓒ뉴스타운

대한민국은 건국 과정부터 미국과 직결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개전된 태평양전쟁(미일전쟁)은 일본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개전초 잠깐 공세가 진행되었을뿐 미드웨이해전으로 수세로 전환되고 곧 절망적 항전이란 대책없는 소모전에 내몰린 것이다. 미국은 일본이 가진 무가(사무라이)사회, 병영국가에 본국 상륙을 앞두고 일본 전국이 게릴라전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여기서 핵무기는 하나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인구 10만의 희생으로 수백만 희생을 막는 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본 본토 상륙의 어려움은 러시아에 새로운 기회였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 불과 일주일전에 대일본전쟁선포는 중일전쟁으로 초토화된 관동군을 몰아내고 순식간에 밀고 내려왔던 것이다. 소련은 일본의 항복직후 미군에 앞서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왔던 것이다.

이 전쟁 말기에 미국은 위대한 대통령 루스벨트를 잃었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지휘하던 루스벨트는 과로사한 것이다. 대선 4선의 카리스마 있는 대통령을 잃은 미국은 그의 전후 구상의 실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처칠과 함께 전후를 주도해온 루스벨트의 자리는 고졸출신의 해리 트루먼에게 돌아갔다.

이 와중에 한반도는 38선을 기점으로 분단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논의 되던 남북분단안이 500년만에 실현된 것이다. 독일의 경우와 달리 북한의 괴뢰정부는 중소의 배경으로 적화통일을 노렸다. 소련군 점령으로 일사분란하게 적화된 북한과 달리 남한은 혼란과 무정부 상황이 절정에 달했다. 전쟁동원과 항일운동 등으로 귀국인사가 줄을 이었고 국내는 공산, 민족계로 나뉘어 폭동과 암살이 횡행했다. 미군의 점령정책도 한몫을 하였다. 마침내 해방 3년인 1948년 8.15 남한정부의 성립을 보게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건국 직후 많은 난관에 직면하게 되었다. 미군철수와 친일파 청산 등이 그것이다. 건국 직후 국회는 미군철수를 의결하고 미국은 빠르게 철수를 단행하고 대만과 함께 한국을 미국의 안보라인에서 제외했다. 소위 에치슨라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공의 위세를 등에 엎은 김일성정권에 좋지 못한 신호를 제공하여 마침내 6.25로 발발하게 하였다.

6.25에 미국은 은혜의 나라였다.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은 신속했고 의지는 확고하였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은 초기 2-3개월의 북한 우세, 이후 3개월여의 유엔군 우세, 그리고 중공군 참전으로 장기적 소모전으로 진행되었다. 이 사이 미국 대통령도 아이젠하워로 바뀌었다. 휴전을 원하는 조야의 분분한 의견속에 이승만 대통령은 기지와 협상을 통해 한미군사동맹과 60만 국군을 유지할 지원을 약속받는다.

미국의 대한민국 지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전후 유럽에 대한 지원(마샬플랜)에 버금가는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1965년 이루어진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한 일본의 대한지원도 미국의 압력이 결정적이었다. 또한 한국은 월남전 참전으로 군사동맹의 역할을 보였고, 미국은 한국에 무역최혜국대우로 불과 10년만에 대미수출액이 100배에 이르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한국의 대미 태도가 바뀐 시기는 1980년대 였다. 전두환 군사정부의 성립이 전시작전권을 가진 미군의 용인속에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게 한국의 군사정부는 부담되는 것이었다. 5.16 당시에도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변에 불쾌해하여 초기에 일체의 대한지원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남북대치 상황에서 최선은 차선의 최악의 적이었다.

하지만 한미관계가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른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민주화 이후에 찾아왔다. 바로 김대중 노무현정부에서 보여준 일련의 친북 반미정책이었다. 김대중정부의 소위 퍼주기식 대북일방지원정책은 미국을 당혹케하였고 훈련중 발생한 미군인명사고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대통령(DJ)이 직접 언급하는 상황까지 악화되었다. 또한 노무현은 전시작전권 반환을 줄기차게 요구하였고 공사석에서 반미성향을 표출해왔던 것이다.

이제 한미관계는 또 다른 상황으로 가고 있다. 1994년 미국 정보기관 NIMA가 북한 영변지역에서 핵개발의 증거를 확보한 것이다. 이에 클린턴 행정부는 북폭을 준비하고 한국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당시 대통령(YS)는 극구 반대하여 포기한바 있다. 다시 20년이 흘러 북한은 명실상부한 핵무기보유국이 되었다. 이제 북한은 세계최고의 병영국가이자 핵, 생화학무기, 땅굴, 특수군, 사이버테러란 5대 비대칭전략무기를 가진 흉수집단이 된 것이다.

다행하게도 70년전과 달리 중국과 러시아가 예전과 달라진 점이다. 이제 한국은 100년전 이승만 대통령께서 깨달으신 민족과 세계의 흐름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한미관계는 단순히 양국간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질서의 축이자 한민족의 운명과 함께한 것이다. 이제 호주의 외교정책인 "미국이 가면 우리도 간다"를 전향적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