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를 타고 떠나버린 숙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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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를 타고 떠나버린 숙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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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134>박인환 특집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가을들녘
ⓒ 이종찬^^^
 
 

그해 가을에는 단풍이 무척 곱게 물들었습니다. 티 한점 없이 짙푸른 하늘에서는 누군가 손가락만 살짝 갖다대어도 금새 쨍그랑 소리를 내며 유리가루가 되어 하얗게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해 그날은 우리 집 앞마당을 수호신처럼 지키는 감나무 가지에서 까치 몇 마리가 마지막 남은 홍시를 콕콕 쪼아대며 깍깍거리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멀리 앞산가새에서는 마을 아낙네들이 실하게 든 무를 풍경처럼 뽑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라디오에서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란 시가 낙엽 밟는 소리 같은 음악을 타고 잔잔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를 듣는 순간 갑자기 소주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마산 무학산 서원골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무작정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서원골로 향했습니다. 서원골 입구에는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띄엄 띄엄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나는 서원골 아래 조그만 구멍가게에 들어가 소주 서너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서원골로 들어갔습니다. 서원골 곳곳의 평평한 바위 위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무언가를 나눠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서원골 맨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는 골짜기에 무작정 퍼질고 앉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란 시가 적힌 종이를 맑은 계곡물에 띄워 놓고 그 시가 깨끗히 사라질 때까지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잉크로 쓴 그 시는 처음에는 글자 모양대로 파랗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소주 서너 병을 다 비웠을 때 그 시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날 나는 시가 사라진 그 백지를 오래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목마를 타고 떠나는 숙녀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방울소리를 울리는 목마와 숙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비운 소줏병 사이에서 가을바람 소리만이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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