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키지 못한 약속 중 하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을 단 한 번의 외교적 수단으로 끝내겠다는 것이었으나, 취임 7개월이 다 돼가는 시점에서 겨우 처음으로 오는 15일 알래스카에서 ‘대면 정상회담’을 하게 됐다.
전쟁의 당사자이자 서방 진영의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참석 없이 트럼프와 푸틴 두 사람만 만나서 전쟁의 끝을 논의하겠다는 것으로, 당사자 없는 협상과 합의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도드라지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내적 정치 능력과는 별개로 주권 국가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미국-러시아만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휴전이든 종전이든 전쟁 유산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는 위협과 압력을 계속 가하고 있지만, 젤렌스키나, 푸틴이나 트럼프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폭탄은 멈추지 않고 떨어지고 있으며, 계속 폐허는 쌓이고 있다.
트럼프는 이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대면 회담이 어렵게 얻은 돌파구를 마련하고, 전쟁 처리에 대한 유권자들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베팅하고 있다. 트럼프의 뇌 속에는 노벨 평화상이라는 당근이 어른거릴지 모른다.
트럼프에 우호적인 지역 공화당의 주(州)인 알래스카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은 트럼프 의 두 번째 임기 ‘최대의 도박’(the biggest gambits) 중 하나라고 NBC 뉴스가 지적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회담을 주최함으로써 그가 분쟁을 중단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NBC는 “트럼프는 영토 문제에 정통하지만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도 누리고 있는 푸틴 대통령과 마주 앉아 협상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함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보장하는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는 것은 트럼프가 자랑스러워하는 협상 능력을 시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Michael McFaul)은 “회담에 미리 준비하지 않고 가면 푸틴에게 방해받을 수 있다”면서 “정상회담은 미국의 국익을 증진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정상회담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며,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자체가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부의 한 국가안보 관계자는 평화 협정 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분쟁 당사자 중 한 명인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며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불법적으로 병합된 영토를 러시아에 넘기는 것을 거부해 왔다. 그러나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일부 영토는 양보하고 다른 부분은 양도받는 형식으로 협상을 마무리하려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트럼프 행정부 관계자는 “다음 1~2주 안에 돌파구가 생길지는 우리가 알게 될 것”이라며, “궁극적으로 푸틴과 젤렌스키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 제3자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는 있겠지만, 이 두 사람은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는 게 합의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
외교 정책 전문가들은 협상가로서 뛰어난 푸틴과 한 방에 앉아 있는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분열시키는 평화 협정’을 지지하도록 유혹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평화 중재자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열망 때문에 ‘그래, 좋은 생각인 것 같아.’라고 말할까 봐 걱정”이라고 맥폴은 말했다. 이어 그는 “푸틴 대통령은 ‘도네츠크(우크라이나 동부 도시)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라고 말할 것이고, 트럼프 대통령은 ’맞아...‘라고 말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맥폴은 이어 “푸틴은 그런 이야기에 능숙하다. 그는 자신의 역사를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팀은 바로 그런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 전직 미국 관리는 푸틴이 전장에서의 성과를 공고히 하려는 희망으로 대통령이 전혀 할 생각이 없는 양보를 약속하며 대통령을 더욱 지연시키려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 동안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대리대사를 지낸 윌리엄 테일러(William Taylor)는 푸틴 대통령이 “나중에 뭔가 약속을 함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중단 및 휴전 목표에서 벗어나게 하려 할 수도 있다”며, “그런데 푸틴은 계속해서 싸우고 우크라이나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결과가 어떻든, ’전쟁‘이라는 용어 대신 ’특별군사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치르고 있는 전쟁에서 푸틴은 적어도 상징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국제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 시기에 크고 밝은 무대를 얻게 된 것이다. 2년 전, 국제형사재판소(ICC)는 푸틴에게 우크라이나 어린이 납치와 관련된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 영장은 두 세계 정상이 만날 수 있는 잠재적 장소를 상당히 제한했다.
맥폴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을 만나러 가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 세계의 대부분에서 푸틴은 사기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독재자이지만, 그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구나 미국의 땅 알래스카에서 회담하는 것 자체는 미국이 그동안 주장해 온 민주적 가치와 법치주의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깨는 것이다. 서방 세계의 주장대로라면, 푸틴을 알래스카로 불러들여 그를 체포해 ICC에 넘겨야 마땅하지만, 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번 정상회담은 2018년 헬싱키에서 열린 정상회담과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해 푸틴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수년간 냉각된 미·러 양자 관계 이후 개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는 열망을 드러냈다. 푸틴 대통령이 2016년 대선 개입을 부인한 것을 언급하며,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가 그해 힐러리 클린턴과의 선거에 개입했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자신의 발언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며, 미국 정보기관이 러시아의 개입을 결론지었다고 믿는다고 밝혔지만, 2016년 대선에 개입한 ’다른 인물들‘이 있을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는 트럼프가 더 노련해졌고 푸틴의 전쟁 수행에 인내심을 잃었다. 그는 아내 멜라니아 트럼프가 푸틴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입힌 피해를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푸틴의 경우는 더욱 위축되어 있다. 올여름 기준 러시아 사상자는 1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전쟁 장기화에 대한 보복으로 러시아의 에너지를 구매하는 국가에 2차 제재를 가할 수 있는데, 이는 이미 트럼프가 경고한 조치이다.
윌리엄 테일러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첫 회담보다 더 유리한 입장에 있다. 트럼프가 푸틴과의 회담에 참석해 자신이 가진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휴전이 이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내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정상회담에 임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제프리 엡스타인 사건(Jeffrey Epstein case)으로 인한 지지층의 반발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주 트럼프는 고용 보고서에서 일자리 증가율이 저조하다는 결과가 나오자 노동통계국장을 해임했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캠퍼스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38%로 나타났다. 이는 4월보다 6%p 하락한 수치다. 여론조사 책임자인 알렉산더 테오도리디스(Alexander Theodoridis)는 “지지율이 양극화된 이 시대에 그는 이론적으로는 최저점에 꽤 가깝다”고 말했다.
트럼프 유권자 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처리에 대한 지지율은 64%로, 다른 현안에서는 훨씬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고 테오도리디스는 밝혔다. 트럼프의 2024년 유권자 중 이민 문제에 대한 지지율은 85%, 일자리 문제에 대한 지지율은 78%, 관세 문제에 대한 지지율은 71%였다.
국정 운영은 대통령이 국내에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검증된 방법이다. 최고 사령관은 국내 문제보다 외교 정책 분야에서 상황을 형성하는 데 훨씬 더 큰 자유를 누린다.
델라웨어주 출신 민주당 소속이자 외교위원회 소속인 크리스 쿤스(Chris Coons) 상원의원은 “이번 정상회담은 트럼프가 푸틴에 맞서 우크라이나에 정의로운 평화를 요구한다면, 그에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화제를 바꿀 것”이라며, “그건 긍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지만, 이번 (알래스카) 정상회담이 관세나 엡스타인 같은 국내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로 진행되고, 그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못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가 갈등을 종식시키려는 또 다른 동기는 그가 탐내는 노벨 평화상 수상일 수 있다. 그의 백악관은 그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주장을 체계적으로 전개하며, 전 세계 분쟁 지역의 긴장 완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에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26년 노벨상 후보 추천 마감일은 1월 31일이다. 노벨위원회는 그해 10월에 수상자를 발표할 예정이다.
8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미국이 중재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협정 체결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두 정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세 명의 미국 대통령이 수상한 상을 수상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가장 최근 수상자는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의 평화 협정은 핵무장국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는 것에 비하면, 단지 흥밋거리일 뿐이라는 게 NBC뉴스의 보도이다.
윌리엄 테일러는 “푸틴은 분명히 약체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에게 재앙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트럼프는 이번에는 카드를 가지고 있다. 그는 지렛대, 경험, 그리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 그는 푸틴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푸틴은 그와 전쟁의 종식을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이 알래스카의 트럼프-푸틴 정상회담에 대한 엇갈린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쟁 종식이 아닌 국내 정치적 난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정상회담이거나 노벨 평화상을 ’평화쇼‘(a show of peace)로 수상해 보겠다는 속내는 진정한 평화 중재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세계는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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