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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
해방과 더불어 미국 군용차 시대의 개막
<도표 9-4>를 보면 해방당시 등록차량 대수는 7,386대로써 영업용승용차는 362대, 영업용트럭이 1,693대, 영업용버스가 1,156대이다.
일본차의 부속품은 귀해져만 갔다. 이때 미군용차의 각종 부품이 고물상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헌 차에 달려 있는 엔진을 GMC 엔진이나 "쓰리쿼터" 엔진으로 바꾸고 기타 부품도 미제 부속으로 교체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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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
더욱이 우리나라의 육송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했던 미군정 당국은 1945년 말부터 1949년까지 군용차를 정식으로 불하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수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1945년에 7,326대이었던 것이 1949년에는 16,431대로 5년간에 123%가 늘어났다.
그러나 늘어났다고는 해도 우리나라 전 국토를 뛰고 있는 자동차 총수는 겨우 1만 6,000대였다. 이중에서도 화물차가 급격히 늘어났다.
관용(官用) 트럭이 469대에서 → 2,902대로 2,433대, 자가용 트럭은 1,477대에서 → 4,058대로, 2,581대 늘어났고 영업용 트럭도 1,693대에서 → 2,715대로 1,022대 늘어났다. 그래서 화물차는 6,000대 정도 증가하였다. 즉 우리나라의 육상수송을 위해서 미군 차량을 불하한 수가 이만큼 되었다는 뜻이다.
관용 승용차가 갑자기 늘어난 이유는 지프차의 불하 때문이었다. 당시 장·차관, 국장 등의 승용차는 거의 지프차였다. 당시 화물차는 GMC, 승용차는 지프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교통수단인 버스와 택시의 부족문제였다. 도시는 도시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문제가 컸다. 그러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일까?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수공업적 자동차 조립시대가 시작된다.
버스
해방 당시 1,156대였던 것이 이미 수명을 다해 1948년에는 654대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버스조립이 시작되었다.
GMC의 하체(프레임 Frame)에 GMC 엔진을 올려놓고 외피만 버스로 만드는 작업이다. 소위 보디(Body) 작업이다. 순전히 수공업적으로 했다. 5∼6명이 한 조(組)가 되어 엉성한 도면에 따라 철판을 두드려 만들었다. 한 대의 "보디"를 완성하는 데 약 1개월이 소요되었다. 특별한 건물이나 시설도 없었다.
공터만 있으면 천막을 치고 만드는 것이었다. 수공구(手工具)와 산소용접기만 있으면 시작하는 것이었다. 장소를 옮겨가며 버스를 만들어 주는 "집시(Gypsy)형 보디 작업반"도 생겨났다. 군용차라서 엔진은 힘이 좋고 하체 동력전달장치는 튼튼했다. 완성된 버스는 일정 때 나오던 버스에 비해 성능이 우수했고 좌석(座席) 수도 많아졌다. "쓰리쿼터" 엔진을 탑재한 합승(合乘)버스도 생겨났다. 일본제 버스는 자연히 도태되어 갔다.
이 점은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발전에 있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만일 우리나라에 "보디 기술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대중교통수단은 버스 형태가 안되었을 것이다. 동남아 나라와 같이 지프차를 좀 개조해서 역마차(驛馬車) 형(型)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마차쪽이 기술이 덜 필요하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행히도 버스가 먼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일정 말기에 "보디제작 기술"이 개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이 자동차공업의 출발에 있어 동남아 여러 나라와 다른 점이다. 기후 탓도 있다고 본다. 동남아에서는 유리창이 필요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리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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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
그런데 국난이 닥쳐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국내에 있는 화물차는 군에 징발되었다. 버스조차도 징발되어 군인을 싣고 일선으로 나갔다.
전쟁통에 많은 자동차가 파괴되었다.
1949년 통계에 16,431대로 나오고, 1951년에 8,655대로 나오니 약 절반으로 줄었다는 결과인데, 이 수치조차도 믿을 수가 없다.
전선(戰線)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라 통계가 제대로 나올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울 근교에 있던 "보디" 업자가 대거 부산지방으로 피난가서 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전쟁통에 자동차 엔진을 포함한 각종 부품을 구하는 것은 아주 손쉬었다.
부산에 있던 자동차 고물상은 큰 성황을 이루었다. GMC나 지프차를 통째로 살 수도 있었고 값도 무척 쌌다. 이래서 버스의 수가 늘기 시작하였고 모양도 좋아져 갔다.
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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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
1955년 8월에 국산장려회(國産奬勵會) 주최로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가 창경원에서 개최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엔진을 장착한 자동차가 출품되어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 이 차는 시발자동차회사(사장: 崔茂盛)에서 만들었는데, 엔진은 미군 지프의 엔진을 모델로 국산화하였고, 차체는 철판을 두드려 수공업적으로 제작했다.
이 시발차의 모양은 좀 촌스러웠지만 인기는 아주 좋았다. 거의가 택시로 팔려 나갔는데 택시가 모자랄 때이니 모양이 좋고 나쁜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돈벌이가 잘 되면 되는 것이었다. 시발차 한대면 그 수입으로 중류생활을 할 수 있었다. 없어서 못 파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시발자동차 회사도 수지가 맞는가 했는데,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자동차공업계에 찬물을 끼얹는 정책이 나온 것이다. 소위 "5.8 라인"이라는 긴급조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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