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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를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1970 - 보리밥은 먹을 수 있게 됐다
1970년은 우리나라의 경제사에서 특기해야 할 해이다. 대망의 10억 달러를 수출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은 시동단계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본격적인 성장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1970년의 호프만계수는 1.39로서 우리나라는 호프만박사가 정의하는 「제3단계공업국(호프만계수 1.5∼0.5)」 즉, 기계 및 금속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수출이 늘어감에 따라 일자리가 늘어났다. 비단 수출품 생산업체뿐만 아니라 수출연관업체는 물론이요, 모든 산업분야에서 활기를 띠기 시작, 이로서 일자리가 새로 생겨났고, 그 효과는 더욱 파급 확대돼 나갔다. 국민 1인당 GNP도 100 달러를 돌파 1970년에는 250 달러에 달했다.
일자리가 늘고 국민의 소득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많은 농촌의 「보릿고개」도 자취를 감추었다. 비록 쌀밥을 충분히 먹을 처지는 못되었지만 ―2모작(註: '벼와 보리'를 1년에 두 번 생산하는 농사법)을 장려한 결과― 보리밥 만큼은 먹을수 있게 된 것이다.
더구나 국민이 굶게될 때는 보리쌀 정도는 수입할 수 있는 국력도 생겨났다(註: 당시 곡물 국제가격은 쌀이 밀이나 보리값의 2배 이상이었다.
그래서 쌀 대신 보리를 수입하면 2배의 수량이 됐다. <1963년 통계: 쌀 150$/톤, 보리: 66$/톤, 밀: 74$/톤> 국내가격은 20ℓ당 쌀이 736원, 보리가 625원으로 큰 차이가 없다. 보리경작을 장려하기 위하여 보리값을 비싸게 책정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쌀을 절약하기 위해 분식장려책이 나오고 보리혼식이 권장되기도 했다. 쌀밥을 마음대로 먹기 위해서는 100억 달러를 수출한 1977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중반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6년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렇게 큰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소위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한강의 기적 - 근원은 수출증가율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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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농업식량안보를 위해 노력하신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도표 7-2>는 년도별 수출목표 및 수출실적이다. 1964년 11월 1억 달러 수출로부터 시작해서 6년반 만에 10억 달러를 수출하는 과정이다. 이 표를 보면 신기한 사항이 많이 눈에 띈다.
① 1964년부터 1970년까지 7개년간 수출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② 그것도 1965년에 106.2%로 6.2% 초과달성이 가장 크고 1968년에는 100.1%로 겨우 0.1% 초과달성 한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7개년간의 평균은 1.8% 초과달성이다. 이렇게 정확한 「계획 대 실적」은 신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③ 전년대비 수출증가율은 1964년의 39.3%, 1968년의 39.6%를 제외하고는 모두 40%를 넘는데 7개년간의 평균은 41.9%이다. 매년 40%라는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한 나라는 다른 나라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고, 우리나라도 1960∼70년대뿐이다. 그것도 연평균 41.9%라는 극히 평준화되고 안정된 추세이다.
이상과 같이 생각하면 신기하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하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억 달러 수출 - 수출의 날
군사혁명 후 朴 대통령은 국가의 운명과 희망을 걸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요란하게 시작했으나 1963년 말 국가경제는 외환부족으로 파산국면에 들어갔다고는 이미 설명했다.
그 후 朴 대통령은 국가경영 전략의 기본을 수출제일주의로 정했다. 그리고는 마치 수출을 신앙처럼 믿고 밀어붙였다. 수출은 마치 군사작전과 흡사했다. 총사령관은 朴 대통령 자신이었다. 이때 박충훈씨를 상공장관으로 임명, 수출참모본부장 격으로 기용한 것이 수출증대에 큰 효험을 보았다. 1964년 5월 11일 박충훈씨는 장관 임명장을 받고 앞으로의 상공정책에 대해 설명하면서 강력한 건의를 올렸다고 한다.
상공부장관 :
수출만이 살길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나라 전체가 수출제일주의를 국가의 최중요 정책으로 삼고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각하께서 총사령관으로 진두 지휘해 주셔야 합니다. 격려도 해 주시고 애로도 타결해 주셔야 합니다.
朴 대통령 :
알았어. 금년 목표는 얼마지?
상공부장관 :
1억불입니다. 목표는 꼭 달성하겠습니다.
전년도인 1963년의 수출실적은 8,680만 달러로서, 월평균 수출액은 723만 달러였고, 1964년도는 1월 수출이 727.2만$, 2월 536.8만$, 3월 703.5만$, 4월 747.8만 달러, 합계(1∼4월) 2,715.3만$일 때이다. 그러니 1억 달러를 수출하자면 ―5월부터 12월까지 8개월간에 나머지 8,196만$― 즉, 매월 911만 달러를 수출해야 한다.
이것은 당시 여건으로서는 과중한 목표였다. 그러나 박충훈장관은 상공부 취임식 때 朴 대통령에게 서약한 1억달러 목표는 숨기고, 1964년 수출목표를 1억 2,000만 달러로 발표해 버렸다. 이 뜻은 1964년의 수출증가율을 1963년에 비해 약 40%로 높인다는 것이고, ―그것도 취임 후 8개월간에 달성해야 하니,― 매월 평균 1,161만 달러를 수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수출업계에서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박충훈장관은 "현재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외환위기를 타결하는 길은 수출밖에 없다. 朴 대통령이 밀어준다는데 못할 것이 있겠는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보자, 책임은 내가진다"라며 배수진을 치고 설득과 부탁을 했다. 이렇게 돼서 상공부나 수출유관 단체, 수출품 생산업체 등은 전쟁터가 된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수출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품 수출이 급성장하여 전체수출의 55.4%가 되었다. 이렇게되니 무역업자나 생산업체의 수출 무드도 조성되어 나갔다. 그러나 박장관은 업자뿐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까지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아울러 수출업계의 사기도 북돋아 주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수출의 날'을 제정하기로 했다. 박장관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궁리 끝에 수출의 획기적 전환점이 될 1억 달러를 돌파하는 날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64년의 수출목표가 1억 2천만 달러였기 때문에 1억 달러 돌파는 대충 11월 이후가 될 것으로 계산하였다. '수출잔치'로는 적합한 날이었다.
이 같은 상공부의 의견에 따라, 그 해 8월 26일 국무회의에서, 64년도 수출실적이 1억 달러를 달성하는 날을 「수출의 날」로 제정하고 매년 기념식을 갖기로 의결했다. 상공부의 입장으로서는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수출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상공부는 10월을 '수출촉진의 달'로 정하고, 적극적인 수출독려 활동을 벌였다. 휴일에도 세관 등 수출지원부서는 업무를 보았다. 수출물자 하역반도 계속 근무를 통해 수출물자를 하루라도 빨리 선적토록 했다.
상공부당국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연말을 꼭 1개월 앞둔 11월 30일, 우리나라의 수출이 사상 최초로 1억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11월말 현재의 수출실적은 1억 139만 2천 달러.
12월 2일, 이 감격적인 순간의 발표는 김정렴 상공부차관이 맡았다. 박충훈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에 앞서 11월 6일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서독에 파견됐기 때문이었다. 상공부는 12월 2일 장관담화를 통해 "수출실적이 1억 달러를 돌파함으로써, 우리가 염원하던 자립경제의 확립과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점이 마련됐다"고 밝히고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을 12월 5일 거행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수출의 날을 앞두고 예상치 않았던 큰 문제가 발생했다. 11월 24일 이활(李活) 무역협회장을 비롯한 9백여명의 수출업계 대표들은 무역협회 5층 회의실에서 긴급 수출업자대회를 갖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획득한 외화는 수출업자가 전액 사용토록 보장할 것" 등 3개 조항을 결의한 것이다. 그리고 이 결의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12월 5일에 거행될 수출의 날 행사에 불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말하자면 수출업자에게 수입의 특전을 베풀어 달라는 주장이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상공부 당국자들은 몸이 달았다. 그러나 무역협회 회장단을 비롯한 수출업계 대표들도 큰소리를 쳐놓았지만, 정부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큰 걱정이 되었다. 업계의 최대행사라 할 수 있는 사상최초의 수출의 날에 참석 안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출의 날 기념식을 갖기로 한 12월 5일을 이틀 앞둔 12월 3일, 무역업계 대표들은 김정렴 상공부 차관을 방문했다. 수출의 날 기념식에 참석할 수 있는 명분을 찾기 위해, 다소나마 정부가 어떤 약속을 해달라고 속을 터놓았다. 김차관 역시 반가울 따름이었다. "최대한 업계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것이 김차관의 대답이었다.
한 때의 험악한 분위기는 말끔히 가시고 드디어 12월 5일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이 상공부 주최, 대한무역진흥공사 주관으로 시민회관(현재의 세종문화회관자리)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사상 두번째로 수출유공업체에 대한 대대적인 표창이 이루어졌다. 최초의 수출상사 표창은 58년 건국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실시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매년 수출의 날을 맞아 유공자를 표창하고, 수출업계 종사자를 위한 잔치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수출의 날」 행사는 범국민적인 행사가 됐고 수출무드의 진작에 큰 힘이 되어갔다.
1964년이 다가기 2시간 전인 12월 31일 10시경, 드디어 1억 2천만 달러의 수출 목표가 달성되었다. 수출대금이 1억 2,090만 달러 입금된 것이다(註: 한국은행의 통관기준으로는 1억 1,905만 달러로서 목표액 1억 2천만 달러에서 95만 달러가 부족하다. 상공부로서는 단지 95만 달러라는 액수 때문에 목표달성을 못했다고 보고하기에는 너무나 원통했다. 상공부 직원뿐만 아니라 수출유관업체, 수출품 생산업체, 근로자 모두에게 실망을 줄수는 없다고 느낀 나머지 상공부에서는 소위 수출한 외화가 입금한 액수를 기준으로 수출통계를 잡기로 했다. 소위 '입금(入金)베이스'라는 것으로 선수금도 포함되는 액수이다).
상공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저녁 10시가 지났는데도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수출대전 1억 2천만 달러가 입금됐습니다. 이로서 금년도의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고 올립니다. 1963년에 8,680만 달러를 수출했으니 전년대비 39.3%의 신장률입니다. 아울러 제1차 5개년계획의 수출목표인 1억 1,750만 달러도 초과 달성했으니 1차 5개년계획을 2년 앞당겨 달성했음을 보고 올립니다."
상공부 직원은 모두 대기하고 있다가 1억 2천만 달러가 달성될 때 모두 만세를 불렀다. 지금 같아서는 서로 껴안았을 터인데, 그때는 손을 들고 만세만 불렀다. 그리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음 해 연초 박장관 인솔하에 문기상(文基祥) 수출진흥과장과 함께 나는 청와대로 올라갔다. 박대통령이 수출 유공자로 훈장을 손수 달아 주었다. 공업국장인 내가 공업국 직원을 대표하여 수출에 힘쓴 공으로 훈장을 받았다. 이때 김현옥(金玄玉) 부산시장과 조충훈(趙忠勳) 관세과장도 수출유공자로 함께 훈장을 받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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