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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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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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1에 나오는 안창식 인민군 대위

 
   
     
 

대한민국 현대사 중 반드시 바르게 재정립되어야 할 1980년 5.18 무장폭동의 배후에 主敵이자 민족의 共敵인 김일성(김성주) 김정일의 인민군 특수부대가 침투했다는 탈북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는 전라남도 목포를 깃점으로 하여 전남일대에는 친북정서가 아주 잘 발달해 있었다는 증언들이 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증언 1에 나오는 안창식 인민군 대위

침투한 목포,광주를 중심으로 "그들의 조직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질적으로 째여(짜여)있는 북한의 당조직과도 별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 정도에서는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지휘부 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 있었고 김일성 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돼서 북한사람들의 정신 상태 이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북한 체제를 위해 주저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 지 한 순간의 머리판단으로써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증언 2 '평양사자'로 불린 장중한이 쓴 기록 중

"남조선의 전라남도 광주는 해방 전부터 인민들의 애국심과 혁명적인 열기가 다른 곳에 비해서 특별했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의식도 대단히 강하다는 것을 5.18이 시작되기 전부터 첫눈에 알 수 있었다.그들의 머릿속에 잠재해 있는 혁명적인 사고방식은 5.18 사건이 시작될수 있는 충분한 원천이었고 원동력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이 북한 자료 역시 5월 19일 나주에서의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사건의 산증인 김동문 기자의 증언과 짝이 맞는바, 그는 지난 해에 27년간 고이 간직했던 낡은 취재 수첩을 수기 형식으로 공개하면서 북한군 개입 의혹을 5월 19일 당일부터 품었음을 발표하였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5월 20일 찍은 아래 사진은 5월 20일 나주, 화순, 영암 등 광주 외곽 지역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었던 5.18무장단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광주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김동문 기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자, 여기 어째서 북한 자료는 목포라는 지명을 언급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인데, 목포에서 있었던 사건들, 목포를 경유하여 북한군 부대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남한 자료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증언들이 있다. 외부 무장단체가(혹은 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하여 시민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선무 방송을 전옥주 본인의 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방송해 놓고도 그녀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황당하게 여기고 있다. 그 스토리는 이러하다.

탈북군인들이 300 명씩 두 떼로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을 때 일각의 반응은 과연 300 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의 외부 무장단체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준다.

연고생이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했다. 그런데, 그 많은 연고생이 광주시민군에 입대할 목적으로 침투한 사실이 전혀 없다. 즉, 연고생 300 명은 위장명칭이요, 실제로는 외부 불순세력 300 명이었다. 전옥주는 광주사태의 핵심인물이다. 그녀의 선무방송만 없었어도 광주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지 않는가. 광주사태 기간 내내 무수한 선무방송을 했던 그녀가 8년후 기억한 것은 연고생 300 명 침투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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