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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써야 할 5.18역사

기사승인 2018.01.30  17:4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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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영상분석팀이 찾아낸 광수가 모두 499명입니다

   
▲ ⓒ뉴스타운

제1장

“광주폭동”을 “5.18민주화”로 전환한 과정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거래와 흥정이었습니다.

1. 5.18이 순수한 민주화운동이고 광주시민들에 의해서만 주도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2017.7.11더불어민주당 최경환 의원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발의취지는 "5.18에 대한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국가공인보고서도 채택되지 않아 끊임없이 5월 정신이 훼손당해 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5.18의 진실을 정부차원에서 밝히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5.18에 대한 진상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 5.18이 ‘폭동’ 또는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그 표현이 바뀐 것은 과학적 분석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래와 같이 정치계의 흥정과 거래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1) 여소야대의 민주화정국: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선에서 민정당 노태우가 승리했습니다. 후보 단일화를 외면한 민주당의 김영삼과 평민당의 김대중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각 2월 8일 및 3월 17일에 총재직을 사퇴했습니다. 하지만 야당은 5공청산 여론에 힘입어 1988년 4월 26일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권력이 청와대로부터 국회로 이동하였습니다. 1988년 6월 27일, 국회는 이른바 5공특위(‘5공비리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어서 7월 13일 광주특위(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였습니다. 5공특위와 광주특위는 다 같이 전두환을 때려잡자는 특별위원회로 이 두개가 합쳐 엄청난 시너지를 분출했습니다.

광주특위 위원장은 문동환 의원, 그를 중심으로 국회의원 28명이 매머드 조직을 만들어 1991.5.까지 3년 동안 청문회를 열고 보고서를 썼지만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내건 조사범위가 발포명령자, 헬기사격, 집단암매장 등 전두환을 지향한 이슈에 제한됐기 때문이었습니다.

(2) 3당합당을 위한 거래와 흥정: 1990.1.22. 3당합당이 공식화되었고, 민정당이 민자당으로 부풀려졌습니다. 이는 여소야대 정국을 극복하기 위한 노태우의 극약처방이었습니다. 3당 합당에 참여한 김영삼과 김종필은 저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호용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정호용을 그대로 두고서는 차기의 대통령 자리가 자기들에게 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양김은 정호용 제거를 합당의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정호용이 흥정과 거래의 제물이 된 것입니다. 정호용을 제거하는 데에는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 명분으로 내 세운 것이 곧 “정호용은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학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호용은 결국 육사 동기생인 노태우에 의해 강제로 희생되어 2월 8일에 의원직을 박탈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억울함에 분노한 그의 부인은 자살을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5.18이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과학적인 연구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검은 거래와 흥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3) 광주피해자 보상법 제정: 1990년 8월 6일, 야권이 주축이 된 국회는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을 제정했습니다. ‘우선적인 보상’을 위한 이 법률은 ‘치유’와 ‘화합’이라는 정치적 합의에 의해 제정된 것일 뿐, 5.18에 대한 진실이 규명되었기 때문에 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내용은 2011.5.1. "진상규명 없이 제정된 5.18 보상법은 태생적 한계"라는 제하의 노컷뉴스 기획기사에서도 명쾌하게 보도돼 있습니다.

(4) 5.18관련법 3개의 의미: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성역화하려는 사람들은 “5.18이 3대 법률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정립된 지 오래고 1997년 대법원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판결한 사실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3개 법률은 1990에 제정된 “광주보상법” 1995년에 제정된 “5.18특별법” 그리고 2002년에 제정된 예우법을 말합니다.

* 5.18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 관한 법률: (1990.8.6. 제정) -- 노태우
* 5.18민주화운동등에 관한 특별법:(1995.12.21. 제정)-- 김영삼
*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2002.1.26. 제정) --김대중

하지만 이 세 개의 법률은 국회에서 다수결로 제정한 정치적 결정물이었을 뿐 과학적 분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 1997년의 대법원 판결의 의미: 대법원은 [판시사항]에 대해서만 판단합니다. 1997년 대법원 판결에는 [판시사항]이 20개 있습니다. 그런데 이 20개의 [판시사항] 중에는 5.18폭동이 어째서 민주화운동이냐에 대한 판시사항이 없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5.18은 민주화운동이다”라는 증명되지 않은 명제를 판결의 대전제로 하여 전두환 등에 대한 죄를 판단했습니다. 5.18은 순수한 민주화운동이었는데 전두환 등이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것이 전두환의 내란죄라는 것입니다. 증명이 없는 것을 판결의 대전제로 삼은 것은 위법행위입니다. 사법부가 범죄를 범한 것입니다.

2. 5.18에 대한 ‘진상조사 범위’가 진실규명을 차단해왔습니다.

1) 1988.7.13. 광주특위에 의한 진상규명: 5.18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1988년 7월 13일 광주특위(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처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국회의원 28명이 1991.5.까지 3년 동안 조사하고 보고서를 썼지만 그들의 원하는 진실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진상규명의 범위를 발포명령자, 헬기사격, 집단암매장으로 제한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전두환을 겨냥한 정치적 명제였습니다.

2) 1995.7.18.의 검찰 수사보고서: 민-군 검찰이 홥동으로 14개월 동안 조사한 내용이 담긴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보고서 제197-216쪽에는 5.18 지지세력이 제기한 7개의 의혹사건에 대해 검찰이 특별히 조사한 결과가 기록돼 있습니다. 7개 의혹 중 제1의혹은 발포명령 제4의혹은 헬기기총사격 제7의혹은 집단암매장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검찰은 이 모든 의혹에 대해 심도 있게 조사했지만 7대 의혹 모두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런데 5.18세력은 전두환에게 죄를 묻기 위해 작성된 이 검찰보고서마저 믿지 않습니다.

3) 2005_2007까지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노무현시절, 국방부에 설치된 이 조사위원회는 김대중의 측근이라는 이해동 목사의 지휘로 이루어졌지만 그 역시 위 진상규명 범위를 위 3대 요소에 국한했기 때문에 그들의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습니다.

4) 2017.9.-2018.2. “국방부 5.18민주화운동 헬기사격 및 전투기 대기 관련 국방부특별조사단”: 이 위원회 역시 조사범위를 전두환을 지향한 3대 요소에 집착돼 있습니다.

5) 진상규명을 반복하는 의도: 발포명령자가 없다는 사실, 헬기기총 소사가 없었다는 사실, 집단암매장이 없었다는 사실은 이미 군-민 검찰이 합동하여 14개월 동안 연구해서 1995.7.18.에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밝혀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수확 없는 진상조사를 반복하는 것은 노이즈마케팅에 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3. 5.18을 북한이 주도한 것인가에 대한 명제는 규명세력의 ‘규명범위’에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5.18 진실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규명했지만 5.18에 북한군이 온 사실이 없다”는 말은 상투적인 선동용어에 불과합니다.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신성한 5.18에 대한 무엄한 도전”으로 취급되어 민형사 소송을 당하고, 집단구타를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탄압을 자행한 저들의 명분은 오로지 “5.18이 여러 법률에 의해 민주화운동으로 규명돼 있고, 대법원 판결에 의해 민주화로 판명되었으며, 5.18에 대한 진상규명이 여러 차례에 걸쳐 이루어져 왔지만 5.18에 북한군 개입이 있었다는 결론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5.18에 북한군이 왔느냐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나 국회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는 국정원 기무사 검찰 경찰의 대공전문가들로 구성된 합심조에 의해 조사돼야 할 대상이었지만 당시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묻어라, 더 이상의 분열은 안 된다” 강력히 지시하는 바람에 합심조가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이 명제에 대해서는 과학적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북한군 개입문제'는 그 자체가 5.18수호세력에 의해 철저히 봉쇄-응징돼 왔고, 이에 따라 사회는 북한군 개입에 대한 이슈를 입밖으로 내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터부시해왔습니다. 이런 살얼음 판을 벌여놓고, 북한군 개입문제가 오랜 동안 규명돼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입을 막기 위한 선동적인 마타도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2장

5.18을 북한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치지만, 북한군 개입이 없었다는 데 대한 증거는 전무합니다.

1. 1980. 5. 21. 상황 기록한 검찰보고서 9개 줄에 맥가이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 600명 존재가 증명돼 있습니다.

1995. 7. 18.에 민-군 검찰이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92-93쪽(별책증거 11-12쪽)에는 아래와 같은 9개 줄의 매우 중요한 기록이 있습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위 글에서 56대는 356대의 오타로 보입니다. 별책증거 제23쪽에는 200여대, 제33쪽에는 305대, 제76쪽에는 328대 등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군상황일지, 안기부상황일지, 치안본부상황일지, 계엄사 등을 종합한 결과 지만원은 374대로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군대에 관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이 그랬습니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수십 대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쳤습니다. 하지만 군대는 물론 게릴라와의 전투경험이 있는 지만원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습니다.

군부대 이동 상황은 극비 중의 극비정보입니다. 이 극비정보가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위 문장에 들어 있습니다. 군 이동계획에 대한 극비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시위의 주역들이라는 10대의 기층계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복장소를 선택해 사전에 300명이 매복해 있다가 감히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작전능력, 이 역시 기층계급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광주에는 이렇게 조직화된 순수한 민단인 300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전 08:00에 정규군을 공격했다는 것에도 엄청난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적어도 06시 정도에는 300명의 시위자들 각자가 집에서 기상하여 최소한 07:00경 공격대기지점(Line of Departure) 근방에 집결하여 실무적 작전점검을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작전을 개시했다는 말이 됩니다. 10~20대 최하층 노동자 300명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결지에 모여 작전 전 회의를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하고 있다가 정규부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 아마 지구촌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 300명은 전투력이 뛰어난 제20정규사단을 상대로 기습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사단장용 지프차를 위시하여 14대의 지프차를 몰고 곧장 이웃 10여 km 에 위치한 군납업체 아사이자동차공장으로 달렸습니다.

   
▲ ⓒ뉴스타운

이들 300명은 왜 이 어려운 작전을 통해 지프차를 탈취해가지고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직행했겠습니까? 아래에 설명하겠지만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털 군용트럭이 필요해서였습니다(별책증거 31-49). 그런데 그 차량들은 군납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있었습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의 벽은 요새의 벽입니다. 높고 견고하고, 철조망이 있고, 망루가 있고, 경비병들이 있습니다. 경비병들은 높은 망루에 모래 마대를 쌓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여차 하면 발사할 준비를 갖춘 전투병들이었습니다.

이런 벽을 뚫고 그 많은 차량을 탈취하려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합니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는 총이 없습니다. 싸우면 총 없는 600명이 전멸합니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했습니다.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였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 또는 “우리가 20사단 지휘부다. 문 열어라”는 식의 엄포용이었을 것입니다.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 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입니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시대에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기술자들, 군용트럭을 300여대나 몰 수 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계엄사(계엄역사)에는 탈취당한 차량이 군용 민수용 다 합쳐서 총 882대인 것으로 표기돼 있습니다(별책 74쪽 상단). 900대에 가까운 차량을 몰 수 있는 운전자들이 광주에 나타났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이렇게 많은 운전자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 별로 없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할 줄도 알고, 지프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차와 트럭도 몰 줄도 알고 38개 무기고 위치(별책3-49쪽)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무기고 경비병을 단번에 제압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알고, 뒤에 설명하겠지만 8톤 트럭분의 다이너마이트로 2,1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매우 희귀한 기술도 보유했습니다(별책 185쪽).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600명 팀인 것입니다.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상이 지만원이 검찰보고서에 기록돼 있는 9개 줄을 읽는 독해방법이었습니다. 이 9개 줄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이 읽은 방법과 지만원이 읽은 방법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지만원만 보게 된 것입니다.

별책 77쪽에는 당시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195명에 불과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같은 제78-82쪽을 보면 이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직업 등이 기록돼 있습니다. 구두닦이 껌팔이, 자개공, 목공, 철공 등 59개종의 하층직업들에 분산돼 있고 그 80% 정도가 10-20대입니다. 사망한 민간인이 154명, 이들 중 33명이 10대 전후의 아이들입니다(별책 57쪽). 별책 59-64쪽에는 나머지 사망자 119명과 신원미상 12명이 있습니다.

이 119명의 직업과 나이를 보아도 다 20대의 무직자와 식당종업원 급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5.18의 주역들이라며 5.18유공자가 되어 있습니다. 10세 전후의 33명을 제외한 5.18주역들은 사망자와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을 모두 합쳐봐야 불과 349명에 불과합니다. 600명의 절반 정도의 수자입니다. 이러한 직업과 이러한 나이에 속하는 광주시민 349명은 600명도 안되고 번개같이 날아다니는 맥가이버들도 아니었습니다.

2. 1985.5. 안기부가 발행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에는 1980.5.21.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서 38개 무기고를 털어 5403정의 총기,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기재돼 있습니다.

별책 22-64쪽의 안기부 자료에는 38개 무기고들이 언제 얼마나 털렸는지에 대한 목록이 나열돼 있습니다. 북한군의 모습은 5.21.자 상황을 정리한 검찰자료와 안기부자료에 확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자료와 안기부 자료는 사실들만 나열해 놓고 이를 정보로 가공해 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지만원만 이 두 자료들로부터 위와 같은 정보를 가공해낸 것입니다. 가공해 낸 위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이고, 검찰이나 안기부처럼 사실들을 나열만 해놓고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1985년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별책 85쪽) 제35쪽에는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뇌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 . 이리하여 무기탈취투쟁을 시작한 21일 오전부터 오후 4시 현재까지 폭동군중이 탈취한 무기는 카빙총 2,240정, <엠-1> 보총 1,235정, 권총 28정 . . ."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어서 이 책에는 무수한 무기고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중에는 안기부 리스트에 없는 무기고가 6개 더 있습니다., 따라서 전남 전역에서 털린 무기고 수는 44개(안기부자료 38+ 북한자료 6)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4시간만에 턴 것입니다.

3. 북한특수군은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사진들을 남겼습니다. 5.18진상규명에 앞장 선 김양래는 이들 날랜 사람들을 놓고 광주사람들이 아닌 외지인들이라 증언했습니다.

2017.10.12. 5.18기념재단 대표 김양래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증인으로 나와 신문을 받았습니다. 아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들은 총기에 훈련이 되어 있고, 조작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몸매가 단련되고, 행동이 숙달돼 있고, 무전기를 가지고 지휘하고, 맑은 날에도 북한군처럼 총을 거꾸로 메고,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고, 다이너마이트를 조립하고, 전남도청을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일반 광주시민들의 도청출입을 금지하는 등 갑질을 하고, 깔끔하게 생긴 광주사람들(카톨릭농민회 김인태, 학원강사 김중식)을 도청으로 체포해 가서 고문을 가한 후 사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다 광주시민들이냐”고 물었습니다.

김양래는 곧 5.18기념재단 이사장이 된다는 사람으로 지금 현재 5.18 진상조사에 독보적으로 앞장 서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김양래가 법정에서 답변했습니다. “저들은 광주사람이 아니라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중국 고대사 용어로 게릴라를 의미)라고 생각한다.”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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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광주시장 윤장현은 광주시민은 절대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바 없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문에는 광주시위대가 교도소를 5회 공격했다고 판시돼 있습니다. 이는 교도소를 광주시민 모르게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광주시장 윤장현은 2017. 4. 19. ‘광주시민은 결코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지 않았다’며, 광주시위대가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발언한 남재준 대통령 후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습니다(별책 176쪽). 하지만 1997. 4. 17. 대법원 판결서(별책 183쪽)에는 광주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5회나 공격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위 판결문에는 광주교도소를 제3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그 방어 과정에서 공격자들을 살해한 것은 무죄라는 판결까지 판시되어 있습니다. 계엄군이 광주교도소를 지키고 있는 또 다른 계엄군을 위와 같이 집요하게 무력으로 공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법원은 교도소를 공격한 존재는 분명히 ‘광주시위대’라고 하였습니다. 광주교도소는 분명히 공격을 당했고, 그 공격자가 광주시민이 아니라면, 그들은 민간복장을 한 북한군인이라는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북한군이 광주교도소를 공격했다면 윤장현이나 김양래가 그 공격자를 모를 수 있고, 광주시민 대부분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는 일일 것입니다.

5. 498명의 광수 얼굴 중 전남-광주에는 단 1명도 없습니다. 0

“광수”라는 단어는 5.18광주에 왔던 북한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2015.5.5.부터 광수가 쏟아져 나오자 광주시장 윤장현과 5.18기념재단 김양래는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까지 무려6개월 동안 광수 얼굴들을 크게 확대하여 번화한 공간들에서 사진전을 열며 현장주역들은 나서달라 호소했으나 나서는 사람 없었습니다.

   
▲ ⓒ뉴스타운

다급해진 광주시장과 김양래는 방법을 바꾸어 전라도 각 지역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광수 얼굴이 당신 얼굴이라고 우겨라”선동하여 13명을 소송에 내보냈습니다. 498명 중 불과 13명인 것입니다. 재판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이들 13명은 다 알리바이조차 맞지 않는 위계를 써서 소송을 한 것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소송사기에 나선 것입니다. 80대 노파들과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출신들이 앞장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광주 현장에서 촬영된 500명에 가까운 5.18주역들이 광주와 전남에 단 1명도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사진들을 보면 단체를 지휘하는 사람들은 많이 보이는데 5월단체들은 단 1명의 지휘자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 김양래는 법정에서 “광주시위에 어떻게 지휘자가 없느냐”는 질문을 받자 “5.18에는 지휘자가 없다. 모두가 다 지휘자다” 잘라 말했습니다. 지휘자 없는 단체행동이 있다는 말 처음 들어봅니다.

6. 5.18기념재단 공식홈페이지 게시판에 “5.22.15:08 서울에서 온 대학생 환영식 거행”이라는 글자가 기록돼 있습니다. 외지인 500명에 대한 환영식을 거행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5.18기념재단 홈페이지‘타임라인’에는“1980년 5월 22일 15:08 목요일 맑음 서울서 대학생 500명 광주도착 환영식 거행”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2013년 7월부터 2년 동안 기록에서 사라졌다가 네티즌들로부터 추궁을 당하면서 2016년 6월 다시 원상복구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주출신 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은 검찰진술에서 “복면한 500명”이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계속해서 싸우자고 선동한 사실을 증언하면서 그 500명의 외지인이 전두환이 광주사태를 키우기 위해 위장 침투시킨 정부군일 것이라고 믿는다는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하였습니다. 김양래가 진술한 ‘편의대’는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김영택은 1996. 2. 7. 검찰청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5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날 10시45분에 저는 도청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연·고대생 300명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김영택 기자의 진술 및 5.18기념재단의 홈페이지 기록물에는 서울서 온 대학생 500명의 존재가 증명돼 있습니다. 검찰수사기록 및 안기부 보고서에는 정확히 600명의 존재가 증명돼 있습니다.

7. 최고 반열에 있는 5.18유공자들 모두가 무기는 누가 털었는지 모른다 했고, 5월 24일까지 도청은 위엄 있는 사람들이 점령해서 자기들은 5월 24일 오후에야 비로소 도청에 갈 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 정상용(무기징역)의 증언

정상용은 당시 30세의 회사원이었고, 군법회의 제1심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김대중 시절에는 평민당 국회의원,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 ‘정상용의 5.18회고’(별책 98-177쪽)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습니다. 5월 26일 편성된 기동타격대가 10대의 학생들과 20대의 품팔이 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

“21일 누군가가 도청을 탈환했다. 이걸 장악한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닌가?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은 따로 있고, 우리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도청으로 간 거다. 장악한 사람들은 위엄 있는 높은 관료 정도로 보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곧 계엄군이 들어올 것이니 학생들은 나가라’고 말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같은 책(5.18항쟁자료집)에서 박남선(사형선고)은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무기를 탈취한 사람들은 광주가 통제해서 보낸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간 사람들이다”

* 허규정(무기징역)의 증언

“나는 5월 26일 출범한 투쟁위원회의 내무위원장을 맡았다. 우연히 지나다가 공수부대 요원들이 젊은 학생들을 따라다니며 때리는 것을 보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가 나도 공수부대에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운동권에 속했던 것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자격으로 휩쓸렸다. 시민들 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기만 했다. 그 시위는 누가 주도하는 사람도 없고 리더도 없었다. 경찰도 공수부대를 욕하고 우리더러는 들어가라며 보호해주려 했다.”

“종교계 지도자, 재야인사만 들어가고 학생들은 들어오지 말고 나가라 했다. 계엄군이 곧 들어온다 하니까 누구든 책임감 없이 나와 버렸다. 종교지도자들도 나갔고, 일반 시민들도 다 나갔다. 도망 나온 거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멀리 안 가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일부 시민들이 도청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렸다. 나도 다시 도청에 갔다. 갔더니 시국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높아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였다.”

“어른들은 시국수습대책위원회, 젊은 사람들은 학생수습위원회, 어른 청년이 각각 위원회 만들어 가지고 서로 말이 다르고 통제가 안 되었다. 조직이 움직이지 않고 엉망이었다. 그런데 윤석루가 나이도 굉장히 어린데 기백이 있어서 기동타격대를 장악했다. 윤석루는 학생도 아니었다. 특별한 방법은 안 나오고 맨날 회의만 했다. 운동권 간부들은 모두 다 예비검속으로 미리 잡혀 가버렸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개념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23일의 이런 모습을 본 위엄 있는 ‘국장급 공무원들’이 24일부터는 보이지 않았다. 남는 사람들은 오직 종교지도자들, 교수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모두 사태를 여기서 끝내고 시국을 수습하지고 했다. 나도 멋모르고 참여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내무위원장이 된 거다”.

8. 북한에서는 매년 5월이 되면 전 지역에서 시-군 단위로 5.18기념행사를 하면서 남조선 파쇼와 미제의 원수를 갚자는 선동전을 벌입니다(통일부 주간북한동향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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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5.18을 영예의 상징으로 하사합니다(자료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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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김일성이 직접 황석영과 윤이상을 데려다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제작, 1991년부터 주기적으로 상영합니다(통일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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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15.5.18. 광주시가행진에 김대중-김정일-횃불 대형 로고가 등장하였습니다. 광주사람들의 머리에는 “5.18은 김대중-김정일의 합작품”이라는 잠재의식이 내제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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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광주 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장 사진입니다. 당시에는 경찰복을 착용하고 도청 안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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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황장엽과 김덕홍의 증언이 있습니다. 5.18 북한통전부가 저질렀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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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카빈총 사망자가 총상사망자 116명의 75%에 해당하는 85명입니다.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쏘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오발일 수 없는 사격입니다(별책 56-64쪽, 73쪽).

16. 전남도청에 다이너마이트 2,100발 조립이 조립되어 있었고, 폭도들은 이것을 폭파하여 광주시를 날리겠다고 계엄군을 협박했습니다(별책 185쪽, 186-192쪽)

17. 광주시민을 보는 대로 학살했다는 계엄군을 아이들이 이토록 따를 수는 없습니다. 살인을 일삼던 계엄군이 폐허의 시가지를 40일 동안이나 청소해 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폭동 10일 동안 살인마라는 공수부대 5천명이 겨우 광주시민 154명밖에 죽이지 못했겠습니까? 154명의 피가 광주시를 피의 목욕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지 모략이 지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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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광수의 대표적인 얼굴들

5.18광주에 왔던 북한사람들을 광수라고 합니다. 광주 현장을 촬영한 사진들이 매우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미국 정보부에서 영상을 분석했던 영상분석팀이 필명 ‘노숙자담요’의 지휘아래 2015년 5월 5일부터 광수를 찾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제1번광수로부터 지금까지 무려 499명의 광수를 발견했습니다.

이들 중 극히 일부를 아래에 소개합니다. 아래의 모든 사진들은 좌측이 광주현장의 얼굴이고, 우측이 최근의 얼굴입니다. 한 세트의 두 사진이 동일인인가를 분석하는 과정은 많은 양의 페이지를 요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상분석 과정은 홈페이지 ‘시스템클럽’에 수록돼 공개되고 있습니다. 단지 여기에는 많은 상식인들이 “분석 안해도 빼닮았다”는 얼굴들만 나열합니다.

2017.7.13. KBS 뉴스는 “25년 전 탈옥수, 안면 인식 기술에 ‘덜미’”라는 제목의 뉴스를 전했습니다. “미국 미네소타 감옥에서 탈출한 한 남성 탈옥수가 25년 만에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 신분증으로 잘 지내왔는데, 그만 자동차 면허증을 갱신하려다 최신 얼굴 인식 장치에 덜미가 잡혔습니다.” 미국의 차량국(DMV)에 수십만의 찾아야 할 범인들의 안면이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돼 있습니다.

한 시민이 면허증 부착용 사진을 찍는 순간 그 얼굴은 데이터베이스 속의 수십만 얼굴들과 하나씩 대조됩니다. 사람의 눈이 할 수 없는 안면인식을 컴퓨터가 대신해주는 것입니다. 정부청사에도 안면인식용 소프트웨에가 가동되어 직원들을 출입시키고 있습니다. 공항에서도 이렇게 하여 범인을 색출합니다. 노숙자담요팀 역시 광주현장의 얼굴 하나를 컴퓨터에 걸어놓고 데이터베이스화된 북한의 주요 얼굴들을 연결시켜 찾아낸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두 개의 사진을 놓고 두 사진이 동일인이인지를 판독하는 데 가장 먼저 사용되는 착안점은 얼굴의 윤곽, 전체적 이미지, 특이점, 특징들입니다. 같은 공간에 들어가는 얼굴 부위도 비교대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전문가적 관점에서 분석을 한 후에 얼굴지문을 그립니다.

미국 DMV 컴퓨터 논리가 비로 이러한 것입니다. 안면 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얼굴의 지문화입니다. 아래는 얼굴 지문의 예입니다. 좌측에는 매체들에 소개돼 있는 얼굴지문이고 우측의 두 얼굴은 탈북자 장진성의 광주얼굴 및 최근얼굴에 대한 지문입니다. 기하학적 외곽선들이 일치하면 두 얼굴을 동일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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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의 사람들은 얼굴의 전체만 한번 훑어보고 ‘닮았다’ ‘안 닮았다’를 가볍게 판단합니다. 이는 과학이 아닙니다. 상식인도 아래의 간단한 요령만 알면 안면분석 능력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발제선’을 비교해보십시오. 발제선은 이마와 머리의 경계선입니다. 경계선에도 생김새가 있습니다. 이마를 보십시오. 이마의 넓이는 물론 대면각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마가 수직이냐, 뒤로 경사가 져 있느냐, ‘미릉골’을 비교해보십시오. 미릉골은 미간을 포함하여 눈썹 뼈대의 생김새입니다. 한일자로 생긴사람 갈매기 형으로 생긴 사람 등 매우 다양합니다. ‘안와’도 관찰대상입니다. 눈을 감싸고 있는 둥근 뼈입니다. 인중(코와 윗입술 사이)의 길이와 생감새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법령선(코 아래 부분에서 턱으로 흐르는 골)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광대점. 산근(양 눈 사이의 코), 광대점, 귀, 코, 콧구명 등 하나 하나 살펴보면 안면에 대한 가독성이 높아집니다. 얼굴에 나 있는 특이한 근육, 점, 상처, 입꼬리 등 세심한 관찰이 동원됩니다. 황장엽 얼굴에는 S자 형 근육이 돌출돼 있고, 3개의 사마귀 점이 있고, 입꼬리가 둥근 우물처럼 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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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제498광수 현 홍콩주재 북한 총영사가 광수선정의 권위를 대변할 것입니다.

주홍콩 북한총영사 장성철, 전남도청 앞에서 교련복을 착용한 상태에서 카메라에 잡혔고, 매우 고맙게도 혀를 내미는 바로 그 순간에 포착되었습니다. 작년 3월, 홍콩 봉황TV와 28분 인터뷰 하는 데 무려 32번씩이나 혀를 내밀었고, 노숙자담요님이 그 32개의 순간 모두를 포착하였습니다. 뺨에 나 있는 깊은 흉터도 똑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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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제1광수로부터 제497광수까지를 부인한다 해도 제498광수까지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한 사람만 인정해도 광주에 북한특수군은 온 것입니다. 이 사진이 촬영된 당시의 도청은 수많은 광수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상분석 전문가인 ‘노숙자담요’가 해남에 사는 80대 초반의 안노인, 목포에 사는 90대 초반의 안노인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광수놀음을 했다는 것이 5월단체 및 광주시청의 주장이고 이들의 주장을 4개의 사건에서 무더기로 인용해준 사람들이 광주판사들입니다.

결 론

제1장의 의미:1988년 말, 5.18은 “광주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그 호칭이 돌변했습니다. 그것은 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1987년 전두환의 레임덕 시기로부터 일기 시작한 민주화의 쓰나미가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5공청산이 사회적 대세가 되었고 이에 따라 5공특위 광주특위가 형성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전두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마녀사냥이었습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노태우가 제19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당선은 되었지만 민주화의 쓰나미와 여소야대에 떠밀려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노태우는 여기에서 벗어나야 했고, 양김은 노태우를 이용해 차기 주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양김은 돌출돼 있는 정호용을 그대로 두고서는 차기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3당합당에 임하는 대신 정호용을 제거하라” 정호용이 거래와 흥정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희생양 정호용은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는 주홍글씨를 달아야만 했습니다. 이후 태어난 5.18민주화 관련법 3개와 대법원 판결은 이 불결한 거래에서 탄생한 사생아에 불과했습니다. 이 모두는 5.18의 진실을 과학적으로 밝히자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5.18에 대한 진상규명 과정들이 있었지만 그 과정들은 그 동기와 절차에 있어 모두가 다 전두환을 단죄하자는 억지들이었습니다. 발포명령, 헬기사격, 대량암매장에만 그 “규명범위”가 제한돼 왔습니다. 5.18에 과연 북한군 개입이 있었느냐에 대한 주제는 “규명범위”에 속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규명범위"에 속하기는커녕 "북한군"이라는 말만 꺼내도 5월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사법적 물리적 린치와 이지매를 개해왔습니다. ”북한군“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어로 탄압되었습니다. 5.18은 철저히 호위된 성역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규명절차가 진행된다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만큼의 이변이었습니다.

제2장의 의미: 5.18은 북한특수군 600이 앞장서서 저지른 전형적인 게릴라 폭동이었습니다. 선전포고 없이 은밀히 침투해 일으킨 전쟁행위로 이는 국제재판 회부 대상입니다. 제2장의 내용은 100% 객관적 증거가 있는 것들입니다. 이 내용들을 읽고 5.18을 북한이 저지른 것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 상식인들 중에는 없을 것입니다.

2개의 정부문서(검찰보고서, 안기부보고서)가 600명의 북한특수군 존재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5.18기념재단' 공식 홈페이지가 서울에서 대학생 500명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광주가 이들을 위한 환영식을 거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광주-동아일보 기자 김영택이 검찰에서 재확인해주었습니다.

5.18 성역화의 수문장이 광주시장(현 윤장현)입니다. 윤장현은 교도소 공격을 외지인이 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5월단체 총사령관인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는 도청을 장악한 비범한 조직들이 광주시민이 아니라는 취지로 증언하였습니다. 5.18성역화의 양대 수문장이 다같이 북한특수군의 존재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에 더해 최상위급의 5.18유공자들은 그들은 물론 광주의 대학생들 모두가 1980년 5월 24일까지 숨어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총상으로 사망한 민간인이 116명, 그 중 75%에 해당하는 85명이 카빈 총 등 시위대가 탈취한 총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그 시위대에 북한 게릴라가 끼어있었던 것입니다. 광주시민들은 쓰러지는 사람들이 공수부대의 총에 맞은 것으로 오해했고, 이것이 남남전투를 촉진했던 것입니다.

북한교과서는 5.18을 김일성이 지휘한 역사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는 2015년 연합뉴스에도 공개됐습니다. 이러하기에 북한에서는 해마다 5월이 되면 여러 날에 걸쳐 전지역 시-군 단위로 5.18행사를 거행합니다. 북한에서 최고인 것들에는 영예의 상징으로 5.18표시를 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5.18은 광주의 역사가 아니라 북한의 역사인 것입니다.

제3장의 의미: 광주시와 4개의 5월단체들 전체가 나서서 2015.10.-2016.3.까지 6개월 동안 광수사진들을 전시하면서 "현장주역들은 나와주십시오"하고 호소했지만 단 1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의 수장인 광주시장과 김양래가 13명의 전남사람들을 지명했습니다.

”당신이 제 몇 번 광수라 해라“ 하고 소송에 내보냈지만 재판과정에서 이들은 다 사기소송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사기를 쳐봐도 499명 중 겨우 13명밖에 내지 못한 것입니다. 지면관계로 50여명의 광수 얼굴만 여기에 소개했습니다. 광주 현장 얼굴 하나를 특수 컴퓨터에 걸어놓고 북한의 주요 얼굴들을 일일이 컴퓨터로 매치시켜 찾아내는 최신 기법을 사용한 결과입니다.

고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이런 일 하지 못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국과수가 이런 기술의 근방에라도 오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조사결과입니다. 지금은 정부청사에도 이런 얼굴인식 프로그램을 수입해 가동되고 있습니다.

제4장의 의미: 우리 영상분석팀이 찾아낸 광수가 모두 499명입니다. 498명을 다 부정한다 해도 제498번을 부정할 사람 없을 것입니다. 현재 홍콩 주재 북한총영사로 있는 장성철, 홍콩의 봉황TV에 나와 28분 동안 인터뷰를 했습니다. 28분 동안 혀를 32회 내밀었고, 우리 영상팀은 그 32회 모두를 캡처했습니다. 분석과 추적의 매너에 승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만원 박사 j-m-y82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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