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인권탄압 강화 속 톈안먼 대학살 29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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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인권탄압 강화 속 톈안먼 대학살 29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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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의 어머니’ : 비참한 사건은 역사가 됐지만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아

▲ 톄안먼 대학살 사건. / 중국 당국의 발표만으로도 사건 전체에서 약 3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망자는 약 2600명, 부상자는 약 1만 명 등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등소평)들이 운동을 “동란(動乱)”이라고 단정한 것이 탄압의 발단이 됐다. ⓒ뉴스타운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중국 정부가 군을 동원해 베이징 톈안먼 광장 등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일반시민 시위대를 무력 탄압한 사건이 발생한지 4일부로 29년이 됐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정치풍파(政治風波), 즉 정치소요사태”로 규정하고, 사건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규제하고 있다. 또 인권변호사에 대한 잇딴 구속은 물론 해외 망명자의 감시 등 중국의 인권 상황은 갈수록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다.

또 중국 정부는 국민 개개인이 가지고 다니는 휴대전화와 스마트 폰 등의 통신기기에 정부가 개발한 감시용 소프트웨어를 강제로 다운로드 하게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다. 감시용 소프트웨어가 내려 받기가 되면, 개인 소지의 전화나 스마트 폰에서 발신하는 모든 정보와 수신 정보 모두가 중국 정부의 감시 시스템 안에 들어오게 된다.

중국의 경우, 휴대폰이나 스마트 폰의 구입과 소지는 실명제이므로 누군가가 자신의 휴대폰과 스마트 폰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발신하면 발신한 본인의 신원이 즉각 파악되도록 돼 있다. 통신기기를 사용한 정치 비판도 완전히 봉쇄된다. 빅 브라더(Big Brother)라는 공포의 시대가 도래되고 있다.

또 베이징 예술가 양웨이동(楊偉東, 양위동, 52세)씨는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있었다. 당시 대학 2학년생이었다. 계엄 부대의 총성이 그칠 줄 모르는 가운데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이 삼륜자전거로 이송됐다. 부상한 종아리부터 뼈가 들여다보이는 상태였다. 그 남성은 “공산당에 당했다”고 외쳤다는 보도가 당시 외신을 탔다.

양웨이동은 새벽에 지인의 숙소로 들어가기 무사했지만, 그 해 9월에 대학에서 시작된 인민 일보의 감상문 제출 등의 “재교육” 거부하자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그 후 표현의 자유를 찾는 예술가로 활동했으나, 지난해 6월에 가족과 독일로 망명했다. 그러나 국외이면서 올해 5월 말부터 중국인의 미행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는 정보가 나돌고 있다. “중국 영사관 앞에서 치러지는 추모행사에 내가 참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게 양위이동의 설명이다. 중국 정부의 국내외를 막론한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지난해 중국 공산당 대회를 거치면서 장기 일당 독재의 틀을 촘촘하게 짜놓은 시진핑 지도부는 탄압 강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7월 사실상 옥사한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민주화 운동가 고(故) 류샤오보(劉暁波)의 부인 류샤(劉霞)는 법적근거 없이 당국의 연금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1월 헌법 개정에 관한 서한을 공표한 인권 변호사 위원성(余文生)도 지난 4월 국가정권 전복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아내의 쉬옌(許艶)씨에 따르면, 그동안 변호사가 유치장을 약 20차례 방문했지만, 접견은 단 한 번도 인정되지 않았다.

톈안먼 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 모임 “천안문의 어머니”는 6월 1일 시진핑 주석에게 보낸 성명을 발표, “비참한 사건은 역사가 되었지만, 재난은 끝나지 않았으며,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진상과 배상 책임 추궁한다”고 밝혔다.

한편, 톈안먼 사건이란 앞서 언급했지만, 지난 1989년 6월 3일 밤부터 4일 새벽까지 중국 정부가 군을 동원하고 베이징 톈안먼 광장 등에서 민주화를 요구하기 위해 모여든 학생과 일반시민 시위대를 무력 탄압한 사건이다. 중국 당국의 발표만으로도 사건 전체에서 약 3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망자는 약 2600명, 부상자는 약 1만 명 등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등소평)들이 운동을 “동란(動乱)”이라고 단정한 것이 탄압의 발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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