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궐기하자, 문재인은 확실한 국군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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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궐기하자, 문재인은 확실한 국군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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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이 서해 교전에도 불구하고 내일 일본에 축구구경을 간다는 게 사실이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 ⓒ뉴스타운

2002.6.29. 참수리호 테러행위에 대한 김대중 청와대: “참수리호에 대한 공격은 의도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

2010.3.26. 천암함 폭침에 대한 문재인 청와대: “김영철을 폭침 책임자로 특정한 적 없다”

히틀러: “내가 유태인 학살자라는 증거 없다

문재인이 한국해군을 적으로 돌렸다, 확실히 

천안함 장병들, 전사한 장병이나 생존한 장병 모두 다 같이 김영철에 의해 당했다. 생존한 장병들이라 해서 그들에게 어찌 고통스런 트라우마다 없을까? 김영철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고, 문재인은 이 고귀한 죽음들을 적대감으로 짓밟았다. 문재인과 임종석, 그들의 아들들이 군대에 갔는지는 몰라도 만일 그들의 아들이 천안함에 승선했다 해도 이런 짓거리를 하겠는가?

지금 이 시점에서 와 북한의 통전부장이요 대남 테러총책인 김영철을 한국 땅 그것도 청와대에 3일씩이나 불러들이는가? 이는 아들들을 조국에 바친 천안함 유족들을 능멸 조소하는 행위이고 대한민국을 유린-모욕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지금 북한은 매우 위험한 처지에 몰려있다. 한국이라는 껍데기를 악용하여 어떻게든 불벼락을 모면해 보기 위해 이 땅에 오는 것이다. 이번 7명의 북한 공작조는 청와대 인간들과 모종의 음모를 꾸밀 것이 확실해 보인다.

청와대는 지금 대한민국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아니라 북한에 충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기관이다. 이들이 하루를 더 있으면 그만큼 대한민국은 침몰된다. 전 국민은 일어서야 한다. 총 궐기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김대중이 국군을 적으로 여기고 해코지한 행위들

김정일의 개 김대중은 1999년 6월 15일 발생한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이 완승한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전투를 지휘한 제2함대 사령관 박정성 제독을 한직으로 보내 예편케 했다. 훈장을 주여야 할 지휘관의 목을 자른 것이다.

2006.6.19. 당시 2함대 사령관은 기자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총 맞을 시간 기다렸다” “선제공격 중지는 군인 손발 묶어 놓는 것”

“두두두 ...파파팍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 28분, 서해상 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북한 함정에서 우리 고속정을 향해 선제사격이 시작됐다. ‘절대 먼저 사격하지 말라는 상부의 지침으로 포위 기동과 함미충돌전술만 싸웠던 우리 해군은 곧바로 자위권 차원의 반격을 시작했다 그 결과가 좌천 후 예편인 것이었습니다”

이후 교전규칙이 대폭 바뀌었다, 우리 해군의 목을 적장에게 비치는 규칙이었다. 아레 교전규칙을 만든 관련자들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6.29에서 참패한 것은 김대중이 지휘관의 소관사항인 야전작전권을 박탈한 데서 기인했다.

김대중은 "절대로 먼저 쏘지 말라", "쏘려면 청와대에 보고부터 하라"는 기막힌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더해 군수뇌는 매우 이상한 "교전규칙"을 만들었다.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보면 당시의 군수뇌는 한국군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됐던 아래의 교전규칙은 기존의 UN사교전규칙을 뒤엎은 것이었다.

첫 번째 규칙은 북한선박으로부터 소총 유효사거리인 450m-500m 떨어진 곳에서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6.29에서 북한이 발사한 85 미리 포의 명중 사거리는 8km나 된다. 450m 앞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과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은 아예 가슴을 갖다 대주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 규칙은 200m에서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아예 맞아 죽으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규칙은 200∼500m 사이의 공간에서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적함은 선수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함정은 기다랗게 늘어진 옆구리를 보이며 적의 앞을 가로질러 가라는 것이었다. 심장을 적의 총부리에 내주고 한동안 옆걸음을 해서 통과하라는 것이었다. 북

2002년 6월 25일, 제2연평해전이 발생했다. NLL,을 유린한 북한 고속정들이 참수리호 등 우리 고속정과 대치했다. 참스리호는 바로 이 제3번째 교전수칙을 수행하다가 비참하게 테러를 당했다. 2002.6.30일자 조선일보 3면에 이런 기가가 있다.

“북 경비정이 갑자기 85mm 함포로 불을 뿜었다. 고속정 2척에 타고 있던 장병들은 즉각 총원 전투배치 상태로 돌입했다. 모든 장병들이 화해와 평화만 믿고 전투배치조차 하지 않은 채 접근했던 것이다. 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저들은 우리 장병을 속이기 위해 6.27일과 28일에도 왔다가 포구를 우리 경비정에 조준하고는 씨익 웃고는 그대로 돌아갔다. 29일에도 포구를 경비정에 조준했다. 장병들은 이번에도 의례히 씨익 웃고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었을 것이다. 이런 속임수로 저들은 일방적으로 테러를 가한 것이다”

2002.6.29. 연평해전에서 ‘선제사격금지’ 명령을 받은 참수리호는 북한의 낡은 함정으로부터 사격을 일방적으로 당해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이들을 싸늘하게 무시한 채 빨간 넥타이를 매고 그 다음 날인 6.30.에 우리나라도 아닌 브라질-독일간의 결승전 경기를 본다며 일본으로 출국하여 경기를 관람했다. 2주년이 지난 2004.6.28. 네이버뉴스 업코리아 기사는 “김대중은 대한민국 편이 아니었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내용을 실었다.

피 끓는 업코리아 기사

서해교전 나자 일본출국, 시민들 “이럴 수가” 충격 , “한국 주둔 美 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2003년 7월 10일자 한 주간지에 실린 故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는 육필수기는 김대중정권의 조국에 대한 배반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2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국군수도병원 체육관. 6월 29일 서해상에서 북한의 계획된 도발로 사망한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 조천형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등 장병 4명의 합동영결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영결식에는 유족들과 전두환 前대통령, 손학규 경기지사, 장정길 해군 참모총장 등 각계인사 500여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국가 최고지도자이자 군 통수권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 뿐만 아니라 김동신 국방장관을 비롯, 국무위원 어느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6월 29일 서해교전으로 온 국민이 분노에 떨고 슬픔에 잠겨 오열하고 있을 때 ‘한가하게’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30일 오전 서울공항을 통해 출국한 것이다.

이날 출국 때 공항에는 이한동 총리를 비롯, 김동신 국방, 이근식 행정자치부 장관,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등 정부 관계자들이 나와 환송을 했다. 이 때 “김대중 대통령이 서해 교전에도 불구하고 내일 일본에 축구구경을 간다는 게 사실이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시민들의 분노가 메아리쳤다.

7월 3일 대전 국립 현충원. 서해교전에서 산화한 4명의 전사자에 대한 삼우제(三虞祭 장사를 치른 뒤 세 번째 지내는 제사) 현장. 행사에는 유족 20여명과 해군본부 소속 장병 10여명만이 참석하고 있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삼우제로서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곳에도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방장관이나 책임 있는 정부 고위관리들의 모습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故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씨(당시 49세)는 “서쪽에서 아들이 죽었는데, 동쪽에서는 금강산 구경 간다고 하고…월드컵 잔치한다고 대통령이 나와 선수들한테 훈장을 주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절규하기도 했다.

다시 서해교전이 있었던 6월 29일. 북한의 군사도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이웃사랑회 관계자 39명, 한양대 관계자 4명,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장 정련 승려 등 5명, 사업가 1명 등 총 50명이 이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고려항공 편으로 방북했다고 통일부가 발표했다.

통일부는 또 서해도발 몇 시간 후 “꽃게잡이 철을 감안할 때 의도된 사건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발표했다.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북한 경비정이 선제 기습공격을 가하는 등 무력 도발행위를 자행한 것은 명백한 정전 협정 위반’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통일부 당국자는 또다시 “국방부측 설명은 북한군의 발포가 의도적이라고 하는 데, 전체적 측면으로는 의도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이르다”고 주장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김대중정권이 누구 편이었던가를 묻게 한다. 과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최소한의 애국심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놓고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인다.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쪽체제와 역대 집권자에 대해서는 끝 모를 적의와 부정적 인식은 보여줬다.

반면에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예컨대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상 유래 없는 폭압적 통치자인 김정일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면서도 한강의 기적을 통해 보릿고개를 넘게 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지난 6월 18일 파이낸셜 타임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은 김정일에 대해 “영리하고 솔직한 사람이며 한국과 세계 문제에 정통해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 “김정일은 끈질긴 개혁가로 북한을 냉전시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끈기 있게 노력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반면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의 권위주의 정부가 경제성장을 가져오기는 했으나, 그것은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 불균형한 성장이었다”고 혹평했다.

일반 개인의 평범한 죽음과 전장에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산화한 목숨은 똑같을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북한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영토를 침범했고, 영해를 지키던 국군이 자그마치 4명(최종 6명)이나 전사했는데, 영결식장에 일국의 대통령이 얼굴조차 비치지 않은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 국민들의 정서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조국을 배반한 행태는 당시 정부 인사들에게 똑같이 전이(轉移)됐는지 국가를 책임지고 있는 각료들 중 누구도 공개적으로 슬픔을 표시하지도 못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북한을 주적(主敵)이라고 부르는 것도 교묘하게 반대하고 방해했다. 80년대 친북노선을 추종했던 운동권출신들이 대거 김대중정권에 참여한 것은 새삼스런 얘기도 아니다. 이들이 북한의 지침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것은 당시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에게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북한과 북한의 입장을 대변했던 재야단체들에 대해 무제한의 관용을 보여준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보수적 시민단체들은 결국 김대중 정권 5년동안 대한민국의 헌법정신, 가치관, 정통성은 근본적으로 훼손되고 말았다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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