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탄생 100주년 특집] 백년에 한번 나올 수 있는 영웅 박정희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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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탄생 100주년 특집] 백년에 한번 나올 수 있는 영웅 박정희 (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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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시대의 한국 안보

▲ ⓒ뉴스타운

뉴스타운은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7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획특집을 마련한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 기록 박물관'임을 자부하는 언론사 뉴스타운이 보유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방대한 기록을 복원해서 원로 세대와 젊은 세대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 첫 회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실증적인 사실 증거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시스템공학 전문가 지만원 박사의 글 '백년에 한 번 나올 수 있는 영웅 박정희'시리즈를 새롭게 편집해 올린다. 

지만원 박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고 전제하고 "일제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라고 주장했다. <편집자 주>

혁명공간의 한국 안보

1961년 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4대 군사노선'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년 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 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월남전은 한국 제2의 전선이었다. 

전 거물간첩 김용규 선생은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에서 "1972년 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라고 썼다.

김용규 선생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명확한 투쟁강령이 없었고, (3)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 6·3 한·일회담 반대 투쟁,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 반대 투쟁, 1969년 험프리 미 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 반대 투쟁, 1969년 7월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 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 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 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 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고 욕을 했고,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지 않았던가. 

김대중! 금강산 사업, 평양체육관 건설, 자동차공장 건설 등 합법적인 방법으로 북한에 5조에 가까운 국가재산을 퍼주었고, 국민 몰래 5억 달러 이상의 군자금을 적장에게 바쳤으며, 자신은 아방궁을 지어놓고 호화롭게 살고 있다. 

이런 자에게 당시의 청구자금이 갔다면 김대중은 그 돈을 어디에 썼을까? 참으로 아찔해진다. 박정희! 진해 별장에서 기자들에게 허리띠를 보여주었다. 나긋나긋하게 얇아져 있는 허리띠였다. 

모든 기자들이 숙연해했다.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하나도 없다. 그가 도둑이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도둑일 것이다. 누구든 박정희를 도둑이라고 주장하려면 증거를 댐과 동시에, 그 자신의 도덕성부터 공개해야 할 것이다. (4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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