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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을 북한군이 주도한 확실한 증거들

기사승인 2017.07.19  16: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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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10일간의 폭동은 5.18-21의 광란작전과 5.22-27의 지루한 수습협상으로 양분돼

   
▲ ⓒ뉴스타운

1. 1995.7.18. 검찰이 작성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① 1995. 7. 18.에 민․군․검찰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제92-93쪽에는 아래와 같은 9개 행의 매우 중요한 기록이 있다. “02:30경 용산을 출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08:00경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는 광주공단 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수백 명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짚차 등 지휘용 짚차 14대를 탈취당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사병 1명이 실종되고(수일 후 복귀), 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356대의 오타로 보임)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

위 차량의 대수에 관하여 같은 제23쪽에는 200여대로, 같은 제33쪽에는 305대, 제76쪽에는 328대 등 다른 자료들에는 모두 300대 이상으로 기록돼 있다. 군상황일지, 안기부상황일지, 치안본부 상황일지, 계엄사 등을 종합하여 필자는 374대로 정리하여 놓았다.  

② 군사적인 상식이 없는 사람들이 위 검찰보고서를 읽으면 아무런 이상한 특이점이나 중요성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1985년의 안기부가 그랬고, 1995년 검찰과 그 이후의 법원이 그랬다. 그냥 시위대가 20사단 차량 부대를 공격해 10여대의 지프차를 빼앗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시위대 600명이 모여 장갑차 4대와 수십 대의 차량을 탈취해 시내로 나갔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을 주는 데 그칠 것이다. 그러나 군대경험은 물론 게릴라전의 경험이 있는 필자의 눈에는 아래와 같이 읽혔다.  

③ 피고가 위 수사결과를 읽고 추론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시위대 3백여 명이 08시에 광주공단 입구(톨게이트 부근)에서 20사단 지휘차량부대를 공격했다”는 의미는 극비 중의 극비정보인 군부대 이동 상황이 이들 300여명의 폭도들에 넘어갔다는 뜻이. 군 이동계획에 대한 극비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5.18의 주역들인 10-20대 하층계급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5.26. 도청, YWCA 등을 지켰던 박남선 등의 광주사람들은 10-20대의 개념 없는 하층계급 70-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20사단 차량부대를 공격한 사람들은 무려 300명이나 된다. 300명으로 이동 중인 현역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과 배짱은 일반 시민이나 학생들에는 없는 능력이다.  

오전 08:00에 정규군을 공격했다는 것에도 엄청난 의미가 내포돼 있다. 적어도 06시 정도에는 300명의 시위자들 각자가 집에서 기상하여 최소한 07:00경 공격 대기지점(Point Of Departure) 근방에 집결하여 실무적 작전점검을 하고, 공격 대기지점에 매복해 있다가 08시에 작전을 개시했다는 말이 된다. 어느 나라 군대에서건 이는 군작전의 기본틀에 속한다. 광주의 10-20대 최하층 노동자 300명이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결지에 모여 작전 전 회의를 하고, 공격대기지점에 매복하고 있다가 정규부대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300명이 사단장 1호차를 포함한 14대의 짚차를 탈취한 후 그것을 몰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는 의미는 아래와 같다. 이 300명은 그 어려운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정규군을 공격해서 이겼다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의 정규군이 자기들보다는 약하다는 사실을 먼저 평가한 후 자신감을 가져야만 감행할 수 있는 행동인 것이다. 이들 300명은 비밀 이동계획을 사전에 파악했다. 이동하는 한국군이 자기들보다 취약하다는 사실을 평가했다. 공격해서 한국군을 패닉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14대의 짚차와 300명을 태울 수 있는 또 다른 차량들까지 운전하여 아세아자동차로 갔다. 극비정보 획득능력, 피아 전투력 평가능력, 전투부대 공격능력, 운전능력 모두를 다 갖춘 이 300명은 절대로 광주시민일 수 없는 것이다.  

⑥ 이들 300명은 왜 이 어려운 작전을 통해 짚차를 탈취해 가지고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직행했겠는가? 아래에서 설명 하겠지만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의 무기고를 털려면 군용트럭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광주의 부나비들에 자신감과 위용감을 안겨주고, 한국군을 차량으로 공격하려면 장갑차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차량들은 군납업체인 아세아자동차공장에 있다. 그 공장의 벽은 요새의 벽이다. 높고 견고하고, 철조망이 있고, 망루가 있고, 경비병들이 있다. 경비병들은 높은 망루에 모래 마대를 쌓고 기관총을 거치하고 여차 하면 발사할 준비를 갖춘 전투병들이다. 이런 벽을 뚫고 그 많은 차량을 탈취하려면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경비병을 제압해야 한다.

경비병과 싸우려면 총이 있어야 하는데 폭도에게는 총이 없다. 싸우면 총 없는 600명이 전멸한다. 총 없는 폭도 600여명이 총을 가진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기발한 작전이 필요하다. 군부대 짚차 14대를 구태여 빼앗아 아세아자동차공장으로 갔다는 것은 “이거 봐, 20사단이 왔으니 문 열어!” 또는 “이 거 봐라, 20사단이 다 일망타진됐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반항하지 말고 순순히 항복하라”는 식의 말을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09:00경 20사단 지휘차량을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시위대 3백여 명이 아세아자동자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 등 차량 56대를 탈취하여 광주시내로 진출하였음.”이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시위대 600여명이 아세아자동차 공장을 점거했다는 말은 경비병력이 순순히 경비를 풀고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갑차와 군용차를 수백대 단위로 내주었다는 것은 차량키를 꽂아주었다는 뜻이다. 그 많은 장갑차와 군용차량들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는 말은 자가운전 시대가 아니었던 1980년 당시 광주에 장갑차를 4대씩이나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기술자들 그리고 군용트럭을 300여대나 몰 수 있는 많은 운전사들이 광주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일반운전병은 제껴두고라도 그 당시에 내가 장갑차4대를 운전했던 4명의 운전병이었다.

그 공로로 유공자명단에 올라있다고 떳떳하게 말할수 있어야 함에도 나서는자가 없다.. 계엄사에 기재된 탈취당한 차량이 군용 민수용 다 합쳐서 총 882대인 것으로 표기돼 있다. 900대에 가까운 위 차량을 몰 수 있는 운전자들이 광주에 나타났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 당시 이렇게 많은 운전자들이 광주시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⑧ 결론적으로 이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할 줄 도 알고, 짚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차와 트럭도 몰 수 있고, 곧바로 뒤에 석명하겠지만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알고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8톤 트럭분의 다이너마이트로 2,0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매우 희귀한 기술도 보유한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맥가이버들이 600명씩이나 광주에 있었다는 것 역시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상이 필자가 위 수사결과보고서의 9개 행을 읽는 독해방법이었다. 이 9개 행을 놓고 군-안기부-검찰-법관들이 읽은 방법과 필자가 읽은 방법이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북한 특수군을 보지 못했고, 필자만 보게 된 것이다.

2. 1985. 안기부 상황일지에 기록된 무기고 탈취 현황

① 북한군의 모습은 5. 21.자 상황을 정리한 검찰자료와 안기부자료 모두에 드러나 있다. 두 개의 문건이 다 비슷한 자료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검찰과 안기부 자료는 사실들만 나열해 놓고 이를 쥬스를 짜내듯이 짜내서 정보를 가공해 내지 못했다. 필자가 이 두 자료들로부터 가공해낸 정보는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총기(소을2호증의 3, 제75쪽 가)와 8톤 트럭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가공해 낸 위 정보가 없으면 북한군이 안 보이는 것이고, 위 정보가 있으면 북한군이 보이는 것이다. 계엄사 제77쪽에는 당시 1심에서 집행유예 이상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195명에 불과하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제78-82쪽을 보면 이들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직업 등이 기록돼 있다. 구두닦이 껌팔이 자개공, 목공 철공 등 59개 종의 하층직업들에 분산돼 있고 그 80% 정도가 10-20대들이다.

사망한 민간인이 154명, 이들 중 33명이 10대 전후의 아이들이다. 같은 제59-64쪽에는 나머지 사망자 119명과 신원미상 12명이 있다. 이 119명의 직업과 나이를 보아도 다 20대의 무직자와 식당종업원급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5.18의 주역들이라는 것이다. 10세 전후의 33명을 제외한 5.18주역들은 사망자와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을 모두 합쳐봐야 불과 349명에 불과하다. 600명의 절반 수준인 이다. 이러한 직업과 이러한 나이에 속하는 광주시민 349명은 600명도 안되고 번개같이 날아다니는 맥가이버들도 아니다.

② 안기부는 1985년 “5.18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이 책의 제55-71쪽에는 5. 21. 낮 12시부터 털린 무기고 이름과 털린 무기 수량들이 박스 단위로 나열돼 있다. 그냥 읽자면 매우 지루하다. 안기부 분석관은 무기고 탈취사항에 대해 같은 책 제23쪽 제5~14행에 걸쳐 아래와 같이 두루뭉술하게 정리했다. 한 마디로 폭도들이 아세아자동차에서 탈취한 차량들을 몰고 전남 여러 곳을 다니면서 무기고를 털었다는 무미건조한 내용이다. 600명에 대한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동자들은) 방위산업체인 아세아 자동차공장을 탈취, 군용 및 일반버스 등 200여대를 탈취, 이를 몰고 장성, 화순, 등지를 휩쓸면서 시위선동 및 무기탈취, 난동자들은 화순광업소 및 광주 소재 한국화약보급소에서 폭약, 뇌관, 도화선을 탈취한데 이어 광주 담양 나주 등 경찰서 파출소 및 예비군 무기고 등에서 무기, 탄약을 탈취하고. 시내 곳곳에서 총격전 및 방화했다”

③ 그러면 1995년 검찰은 무기고 탈취사건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살펴보자. 민․군 검찰이 1995. 7. 18.에 공동으로 발행한 “5.18관련사건 수사결과” 제100~102쪽에는 이에 대한 검찰의 시각이 정리돼 있다. 결론적으로 두루뭉술 그 자체이며 “여러 지역에서 다수의 무기가 피탈되었다”는 위 안기부 식 나열 그대로다.

한편 시위대는 차량을 이용하여 인근 광산, 영광, 함평, 화순, 나주, 영암, 해남, 강진, 완도, 승주, 고창 등지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확보, 무장하였는데, 13:00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 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 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하였고, 13:35경 화순 소재 4개 파출소에서 총기 460여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하였다.

14:00경 나주 남평지서 무기고에서 칼빈 20여정과 실탄 7~8상자를 탈취하고,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나주시위대가 합세하여 나주 경찰서에 진입, 군용 레카차로 무기고를 파괴하고 칼빈 5백여정, M1소총 2백여정, 실탄 4만 6천여발을 탈취하였고, 15:35경, 화순광업소에서 칼빈 1,108정, 실탄 17,760발, 화순 동면지서에서 M1 72정, 칼빈 296정, AR 1정, LMG 1정, 실탄 1만4천여발을 탈취하였다.

이날 하루 동안 일신방직, 호남전기, 연초제조창, 영암경찰서, 화순경찰서, 지원동 석산화약고, 한국화약, 강진성전파출소 등을 급습하여 칼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정, 실탄 13만여발, TNT 10여상자, 수류탄 2백7십여발을 탈취하였다.” 또 “시위대는 이들 무기를 가져와 광주공원과 학운동에서 분배한 후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하였고, 15:00경,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분배받은 시위대가 짚차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상황을 전파하였으며, 17:00경에는 광주공원에서 총기사용교육을 받은 시위대들이 조를 편성하여 정찰, 도청감시, 외곽도로 경계 등의 임무를 부여받고 시내 요소에 비치하기 시작하는 등 이른바 ‘시민군’이라 불리는 무장시위대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음”

④ 이상과 같이 1985년의 안기부 요원들도 1995년의 민․군 합동검찰의 수사관들도 다 같이 원천자료만 나열했던 것이다. 두 시대의 수사관들이 다 같이 “맥가이버 능력으로 훈련된 600명의 폭도들은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를 털어 총 5,403정의 무기를 탈취했다”는 산뜻한 정보를 가공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탈취당한 무기고들을 나열한 ‘나열물’로부터는 북한군에 대한 희미한 실루엣조차 얻을 수 없지만, “시위대 600명은 부대이동에 대한 극비 정보도 얻을 줄 알고, 매복해 있다가 현역부대를 급습하여 이기는 엄청난 작전능력도 가졌고, 작전분석과 작전계획도 짤 줄 알았고, 짚차를 몰고 다닐 줄도 알고, 장갑차와 트럭도 몰 줄 알고,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38개 무기고 위치를 사전에 파악할 줄도 알고, 사전 예행연습을 통해 38개 무기고를 향해 질주 할 줄도 알고, 무기고를 단숨에 부순 후 5,403개의 총기를 탈취할 줄도 알고,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도 알고, 총기사용방법도 교육시킬 줄 알고(소을2호증의 1 제14쪽), 8톤 트럭분의 다이너마이트(소을2호증의 9~11)로 2,000여발의 폭탄을 조립한 매우 희귀한 기술도 보유한 실로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분석 내용에서는 북한군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3. 5.18.-21. 폭동에는 광주인들 가담자 없었다

1) 5.18사건의 초동단계에는 광주인들이 가담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5.18항쟁주역”들로 알려진 김창길,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의 증언에 의하여 인정된다. 이들은 당시 제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 및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5.18 최고 반열의 유공자들로서 이들의 증언은 2002. 12. 전남대학교 출판부가 발행한 "5.18항쟁증언자료집I"에 수록돼 있다. 이 기간에 사망한 사람들은 주로 어린이, 여성들이었고 이들은 계엄군이 없는 장소들에서 북한군에 의해 모략목적으로 살해됐다.

2) 김창길(온건파 학생)의 증언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5월 22일 아침에 도청에 들어가 시민수습위원회 만들어 계엄군과 협상하기 시작했다(소을2호증의 6 제103쪽). ② 생면부지의 장인홍씨가 나에게 물었다. 자네 누구냐? 저는 전남대 3학년 김창길입니다. 그러자 장인홍씨는 ‘그럼 잘됐다. 지금 계엄사와 협상하러 가는데 학생 대표 1명이 필요하다. 자네가 같이 가자(같은 제108쪽 가, 나).

③ 학생수습위원회에 학생은 서너 명뿐이고 나머지는 일반인들이었다(같은 제109쪽 가). ④ 시민군 조직은 도청에서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라 자생적 조직이었다. 이런 조직이 무기를 회수하러 다녔다(같은 제110쪽 가). ⑤ 시민수습위원회 사람들은 아침에 넥타이 매고 출근했다가 딱 시간 되면 퇴근했다(같은 제111쪽 가). ⑥ 윤상원(주: 이른바 5.18의 영웅,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과 정상용 등은 5. 24. 오후에 도청에 처음 들어왔다(같은 제112쪽 가). ⑦ 시민수습위원회의 헤게모니가 조비오, 김성룡 신부들로 완전히 넘어 간 시점이 5. 24. 저녁이고, ‘항쟁지도부’가 생긴 시점은 5. 26. 아침이었다(같은 제113쪽 제14행 나)라고 합니다.

3) 강경파 학생 김종배(제1심 사형)의 증언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윤상원, 정상용, 김종배 셋이서 이전의 수습위원회를 엎어버리고 25일 저녁에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같은 제114-115쪽 가). ② 수습위원회에는 온건파와 강경파가 있었다. 온건파는 무기를 반납하자는 파이고 강경파는 끝까지 싸우자는 사람들이었다.

25일 밤 강경파가 온건파를 몰아내고 ‘투쟁위원회’ 만들었다(같은 제116쪽 나). ③ 25일 밤, 박남선이 총으로 위협해서 온건파 김창길 등을 추방했다(같은 제119쪽 가). ④ 기동타격대는 실내장식업을 하는 이재호가 조직하고 윤석루(19세 구두공, 제1심 무기형)가 대장을 했다. 윤석루는 대장이긴 해도 어리고 뭘 몰랐다(같은 제121쪽 가).

⑤ 21일 저녁에 총이 나왔다. 22일 총기를 반납하자는 수습방안들이 나왔다(같은 제123쪽 가). ⑥ 박남선은 도청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같은 제125쪽 가). ⑦ 투쟁위원회에 모인 정상용 등 몇 몇 사람들은 다 끼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교련반대, 긴급조치위반, 민청학련 빈민운동 문화운동 등을 했던 사람들이었다(같은 제127쪽 가)라고 합니다.

4) 정상용(1심 무기형)의 증언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항쟁지도부는 급조된 조직이다. 나는 외무위원장을 맡았다. 그 이전에는 시민학생수습대책위가 있었는데 총기를 반납하자 해서 이를 거부하고 만든 조직이다(같은 제128쪽 가), 그날이 25일이다(같은 제128쪽 나). ② 시민학생수습대책위의 기본 골격은 무기반납이었다(같은 제130쪽 가). ③ 23일부터는 무기반납 쪽으로 선회했다(같은 제131쪽 가). ④ 항쟁지도부의 활동기간은 5월 25일 오후부터 27일 새벽이었다(같은 제131쪽 나).

⑤ 26일 우리가 재무장을 하기로 결의하고 발표하고 조직을 짜려는 순간 진압 당했다(같은 제132-133쪽 가). ⑥ 5월 19일부터 윤상원 등 투사회보 사람들이 녹두서점(주: 윤상원이 점원으로 있는 서점)에 모여 작업도 하고 전략회의도 했다. 21일 총격전이 나자 모두 흩어져 각자 도생했다. 이날 수시로 위험하다는 판단이 나오면 보성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등 숨어 다녔다. 본격적인 재집결은 22일부터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한 YWCA를 계속 활용했다(같은 제136쪽 가). ⑦ 김종배와 허규정은 조선대 학생일 뿐 운동권은 아니었다(같은 제137쪽 가)라고 합니다.  

5) 허규정(1심 무기형)의 증언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나는 처음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인줄도 몰랐다(같은 제143쪽 가). ② 투쟁위에서는 누가 나서서 주도하는 사람도 없었고 리더도 없었다(같은 제145쪽 가). ③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장악한 사람들이 도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신분을 다 확인했다. 우리가 도청에 들어간다고 하자 높은 사람들로 보이는 관료들이 ‘계엄군이 들어오니 나가라’고 명령했다(같은 제148쪽 가, 나).

④ 25일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맨날 회의만 하고 대안은 못 내고,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같은 제151쪽 가, 나). ⑤ 도청에 모인 사람들은 고등학교학생들과 나이 어린 사람들이었다. 광주의 운동권들은 계엄 검거령이 내려져 모두 잡혀갔다, 그래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운동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같은 제154쪽 가)라고 합니다.   

6) 원고 박남선(1심 사형) 증언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시위에서는 식당종업원, 구두닦이 등 가장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들이 제일 앞장섰다. 소위 운동권들은 다 도망갔다가 5. 23.-25.경에 도청에 들어왔고 지식인들은 수습위원회나 만들어 가지고 얼굴 세우는 일만 했다(같은 제163의 가). ② 도청 내에 남아 있는 인력은 100명 정도였다(같은 제172쪽)라고 합니다.

4. 광주교도소 공격, 누가 했나?

① 전 국정원장 남재준은 대선후보 시절인 2017. 4. 17. 5·18 당시 대한민국 사법부가 판결을 내린 일부 사상범까지 수감된 교도소를 총을 들고 습격하는 것이 과연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5.18기념재단 이사인 김양래와 5.18 성역화에 앞장 선 광주시장 윤장현은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재준 대통령후보를 허위사실 적시혐의로 고소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어서 5.18기념재단 이사이자 고소인인 김양래와 광주시장 등은 “교도소를 공격했으면 시체들이 있어야 하는데 시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상의 내용은 광주일보의 기사에 상세히 기재돼 있다. 

②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제2장 제2항 ‘가’ “광주교도소의 방어 부분과 관련한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의 점에 대하여”에는 광주교도소가 무장한 시위대로부터 전후 5차례에 걸쳐 공격을 받았고, 2.5톤 군용트럭에 LMG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정문방향으로 공격하던 시위대 중 서종덕, 이명진, 이용충(주: 고소인 김진순의 자) 등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으며, 광주교도소는 간첩을 포함한 재소자 2,700명이 수용된 주요한 국가보안시설 이었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아울러 계엄군이 교도소를 향해 공격해 오는 시위대를 사살한 것은 정당한 행위이기 때문에 내란목적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이와 같이 대법원은 광주교도소가 5회 공격당했다 하고, 광주시장 및 광주5.18단체는 광주시민이 교도소를 공격한바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한다. 그렇다면 교도소는 광주시민 모르게 북한군이 공격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청주유골 430구는 교도소 공격의 집요함으로 보나 포장 형태를 보나 광주에서 포장한 유골들이라는 것이 필자의 진단이다. 필자의 저서에 석명돼 있듯이 당시 북한은 교도소를 공격하여 수용자들을 해방시킴으로써 폭동의 동력을 마련하라 지속적으로 통신하였다.

5.  2,000여발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조립, 누가 했나?

① 1996. 10. 10. 광주일보사 특별취재반의 ‘실록 5.18광주항쟁사’ 제79회는 “도청 폭탄뇌관제거”에 관한 기사다. 이 기사는 전남도청에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가 전남도청 지하실에 조립돼 있었고, 이 사실을 양흥법, 김영복, 문영동 등이 광주시의 안전을 위해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준장에 가서 밀고했고(제190쪽 가), 전교사는 1명의 문관을 보내 5월 25~26일 밀고자들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해체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② 광주일보의 이 기사에 적혀있는 문영동, 양흥범, 김영복은 다이나 마이트가 폭탄으로 조립돼 있었다는 사실과 문관 1명이 2일 동안에 걸쳐 이를 해체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다. 광주일보 특별취재팀 여러 명도 이에 대한 증인이다. 전남일보가 거명한 계엄군 측 인물은 김기석, 윤성민, 배승일이다. 거명된 증인만 해도 6명이다. 배승일은 자기가 해체한 다이너마이트 폭탄이 2,000여발이라고 했다. 배승일은 광주시를 지켜냈다는 공로로 보국훈장 동백장을 받았다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그 훈장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소송을 걸어 2007년에 다시 찾았다. 2,000여발의 다이너마이트 폭탄을 해체한 사실은 6명 이상의 증인들로부터 확인돼 있는데 이를 조립한 사람이 일체 없다.  

③ 폭탄을 지킨 위 광주사람들은 광주사람들 중에서는 조립된 폭탄을 해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조립한 사람이 있었다면 해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어야 했다. 폭탄을 조립한 공로로 5.18유공자가 되었다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그 조립은 북한군이 한 것이 될 것이다.

                                               결 론  

5.17전국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무섭게 집행된 예비검속(고문)으로 인해 전국에는 젊은 사람들은 경찰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꼭 꼭 숨었다. 그런데 광주에서만 못할 것이 없는 만능의 맥가이버 전투프로 600명이 활개를 쳤다. 이들은 절대로 품팔이 껌팔이 급으로 구성된  5.18유공자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도깨비들이었다. 이들이 6회에 걸쳐 집요하게 교도소를 공격했고, 다이너마이트를 가져다 2,000여말의 폭탄으로 조립해 놓고 전과확대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5.18 10일간의 폭동은 5.18-21의 광란작전과 5.22-27의 지루한 수습협상으로 양분돼 있다. 전자는 북한군이 주역이었고, 후자는 광주의 교수, 종교인 학생, 평범한 20대 막노동자들이 주역이었다. 

지만원 박사 j-m-y82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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