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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5.18과 지만원의 5.18

기사승인 2017.04.04  14: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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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은 폭동의 주동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 ⓒ뉴스타운

김일성은 10.26을 통일의 기회로 판단했다. 광주 폭동을 위해 10. 26 이후 살인기계로 훈련된 북한특수군을 축차적으로 침투시켰다. 5.18은 이렇게 집결시킨 600명의 특수군이 벌인 광란작전이었다. 광주사람들은 이들을 연고대생 600명이라 불렀다. 살벌했던 5.17계엄이 선포되면서 광주의 운동권 및 대학생들은 잡혀갔거나 사태기간 내내 숨어 있었다. 지각없는 10대와 넝마주이, 껌팔이, 철공 등 59개 직종의 개념 없는 사회불만 계급이 부나비 되어 600명이 벌인 작전에 소모품 노릇을 했다. 이것이 광주시위대의 본질이었다.

당시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형을 받은 12명은 겨우 5월 26일 하루 동안 ‘결사항전’을 선포해 계엄군 작전을 불러들인 ‘무개념 부나비들’이었다. 1981년의 대법원은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600명이 저지른 가공스런 살인-파괴 행위에 대해 처벌할 자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들은 26일 모두 사라졌다. 1997년 대법원은 이 600명과 이들이 동원한 부나비들을 놓고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라 규정했고, ‘’민주화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조기에 진압한 전두환 등을 내란범이라 판결했다. 인민군 판사들이었다.

전두환은 5.18을 불순분자들이 주도한 폭동이었다는 데까지만 이해했고, 그 폭동의 주동자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폭동의 주동자들이 광주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이 살인기계이자 맥가이버로 양성한 특수부대요원 600명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고, 당시의 대남사업부장 김중린이 이끈 또 다른 정치공작대 600여명이 광주에 왔다는 사실을 발굴해 냈다.

광주 사람들 중에는, 민주화시위대도 없었고, 그것을 조직한 사람도 없으며, 10일간의 폭동을 지휘한 사람도 없고, 골목 골목에서 발생한 역사를 현장감 있게 기록한 사람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수행했다.

전두환은 폭동의 주동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특히 5월 21일, 전남 17개 시군에 숨어 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만에 털어 5,408정의 총기를 탈취한 집단을 찾아내지 못했고, 장갑차를 운전한 4명의 운전자, 370여대의 트럭을 운전한 자, 순식간에 도청에 2,100발의 TNT를 폭탄으로 조립한 자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찾아낸 기동타격대장은 겨우 19세의 구두공 윤석루였고, 전두환 시대의 군법회의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5.18주동자들이라고 전두환 시대에 인정되어 사형에서 무기형을 받은 자들은 겨우 5월 25일 도청에 구경하러 개별적으로 한 사람 씩 들어간 무개념 청소년들이었다. 5월 21일의 그 화려한 도깨비 작전을 수행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잡지 못했다. 주동자들은 ‘5.18영상고발’ 사진들에 다 들어 있고, 그들은 모두 다 북한에서 최고 수준으로 출세한 북한인들이다.

지만원 박사 j-m-y828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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