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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지배하는 화려한 사기극

기사승인 2017.03.28  12: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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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을 죽이려는 적의 편에 서서 죽기살기로 싸우는 사람들

눈과 귀를 계속 가려서 장기간 세뇌당한 사람은, 일정 선을 넘으면 자기가 그런 처지임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북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남한의 이야기다. 우리사회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은 너무도 많다. 기득권 이해관계 세력의 힘이 막강한 한국에서 언론들이 보도를 꺼리고 주목을 못받고 있지만, 탈북자와 탈북 군인들이 2009년에 발간한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는 16명의 탈북자와 탈북 군인들의 수많은 증언들이 나온다.

●5.18 공화국 영웅에 대한 탈북 군인들의 증언들

북한에는 광주사태에 참가했다가 돌아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고 제가 살던 곳에는 광주에서 죽고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영웅묘지가 있습니다. 현재 북한 함경북도 소재 청진시 천마산 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습니다.(398쪽)

   
▲ 5.18북한군 김명국 증언 ⓒ뉴스타운

광주봉기가 끝난 후 북한에는 어느 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영웅들이 수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어 영웅이 되었냐고 물어보면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당과 수령이 돌봐주는 애국자로, 혁명의 핏줄을 이어나갈 세대로 지목되어 오늘도 김정일의 관심 속에 별 걱정 없이 살고 있습니다.(361쪽)  

당중앙위원회에서 간부들에게 보낸 지침서에서도 광주무장봉기에 참가한 동지들은 조국통일을 위하여 크게 헌신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하는 것은 당에서 응당 해야 할 일이고 영웅 전사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는 운동을 강력히 전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223쪽)  

평범한 군인가족인 영호네 가족은 영호아버지가 광주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영웅의 가족으로 과거급제하게 된 것입니다. 평양으로 불려간 영호는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고, 가정주부로 살던 영호의 어머니가 함흥시 양복점 초급당비서로 발령 받았습니다.(360쪽) 

묘지의 비석에는 중앙당에서 직접 새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화국 영웅 고 장중한 동지는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인민항쟁을 비롯해서 당과 수령,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 헌신적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조국을 위해 젊음을 바친 고 장중한 동지의 고귀한 혁명업적은 후손만대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장중한 동지에게 영광이 있으라!"(138-139쪽)

   
▲ 김덕홍의 5.18 인터뷰 ⓒ뉴스타운

광주현장에서 죽은 것이 확인된 사람들은 부대로 복귀하지 못했어도 당중앙위원회의 비서국 지시에 따라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고 맏딸인 그가 대리인으로 수훈하게 되었던 것이다.(174쪽) 

각 특수전부대별 80년도 남한침투에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은 자가 40명이었다. 조별 부대별로 작성된 '전투기록장'을 보았다.(34쪽)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김정일이도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수령님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224쪽) 

당시 북한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북한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공화국 영웅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북한군 특수부대인 61저격 여단과 62저격 여단에서 상당수의 소부대들이 남조선에 파견되어 있었고 이를 인솔한 사람은 대대장 이봉원이었다. 평양의 강건 군관학교 출신의 한 탈북자는 광주에 투입된 병력은 모두가 태천군관학교 출신들이었다고 말한다. 광주사건에 남파되었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은 강원도 김화 인근에 안치되어 있고 이봉원은 이후 북한으로 귀대하여 공화국 영웅칭호와 함께 일당백이라는 별도의 칭호를 받았으며 태천 군관학교 소장으로 승진했다. 남조선에 와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만일 광주의 무장폭동이 성공하여 북한의 사주를 받는 김대중과 친북좌파들의 손에 정권이 넘어갔으면 지금쯤 한반도는 통일 되었을 것이고 그 통일은 자유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북한체제가 지향하는 적화통일이었을 것이다. (209-210쪽)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입니다....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북한사람들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257쪽)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나갔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80년도 당시 성인이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거의 다 알 것이다....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39쪽) 

다른 탈북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하나같이 나처럼 대답할 것이라고 믿지만 1980년 5월 18일 광주사건 때에 북한군특수부대 요원들이 내려갔었다는 이야기는 북한사회 전체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탈북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바로 북한의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어느 누구라도 세워놓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들어보거나 아는 내용이 있는 가고 물어보면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바로 이런 대답이 분명히 나올 것이다. "그때 우리 쪽에서 많이 내려가서 싸우고 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닌데요." "우리나라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으면 며칠 동안 광주가 해방될 수도 없었고 남조선사람들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지요"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 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영웅묘지도 있어요." (165-166쪽)  

●북한군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광주 시민을 죽였다는 증언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235-236쪽) 

"쌍 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언질을 받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나는 강원도 태생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골목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그 여성의 뒤를 쫒아 갔다고 한다... 여자가 집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하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서 총을 꺼내드는 순간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에게 달려갔다...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347쪽)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현장에 파견된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말했다. (379-380쪽) 

●5.18을 북한이 기획·실천했다는 증언들

친구 한명이 TV에서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다.(37쪽)

큰 언니 형부가 북에서 특별훈련을 받은 미인 아가씨들도 광주봉기에 개입했고 그들이 뒤에서 조정했다고 하였다.(37쪽)  

남조선에 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온 공장 당 위원회 초급당 비서의 강연시간에 직접 들었다.(38쪽)  

"광주사건! 그거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알겠어요? 우리 쪽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59쪽) 

(내 내연의 남편인 공화국 영웅은)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전라도의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의 동기와 확대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북한의 계획대로라면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 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에 포진된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이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연관 때문이었다....산발적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항쟁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나 주체철학 등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자본주의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 어떻게 북한 사람들 이상으로 김일성, 김정일을 숭배하고 북한체제를 위해서 주저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나서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76-79쪽)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80-81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했으며, 7명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돌아가지 못했다.(87-88쪽) 

저는 올해 1월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나서서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196쪽)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승진해서 어느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TV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그때 광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지만 그와 생활했던 대원들은 모두가 다 광수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성근이를 비롯한 중대 사람들은 그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광주폭동이 가열되고 있는 장소에서 광수가 장갑차에 올라서 괴뢰군들의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204-205쪽)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게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드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 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208-209쪽)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어 실패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231쪽)  

'대내지휘관에 한함'이라는 등급 표제를 달아서 총정치국에서 지휘관용으로 내려 보내는 강연 자료에는....김일성은 광주사건은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는데 남조선 인민들한테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무리였다고 말했다. 또 특수부대 공작조들의 배후교란 작전이 기술적으로 부족하고 크게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광주사건이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300-301쪽) 

땅굴은 탱크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폭은 안 되지만 순수 전투부대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남한의 어느 지역까지 와서 갱도바깥으로 나왔는지는 한밤중이어서 지도상으로 계산해도 잘 알 수 없었다고 했고 밤중에 살펴봐도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은 분명하였다고 하였다. 남쪽 갱도의 출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것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소부대작전은 주로 대낮보다는 밤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지만 23명이라는 인원이 밤길에 동시에 움직이면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분산되어 전라도 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344-345쪽)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375쪽)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신발도 못벗고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정치상학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원들이 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396-397쪽)  

그 특수부대출신의 말을 들어보면 광주사건 때 비폭력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위과정에서 진압군에 의한 자극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북한의 계획적인 수순 속에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광주학살을 대한민국 국군 쪽으로 돌리고 김정일을 감싸주는 친북좌파 애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비꼬았습니다. (421쪽) 

●북한에서의 5.18 기념 사례

북한에는 5.18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대상과 구호들이 많다. '5.18무사고 정시견인차 운동' '5.18소년 호 땅크(탱크)'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누에)청년작업반' 등 5.18광주사태를 기념하기 위한 목적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5.18이후 북한을 현지지도를 하고난 뒤에 붙여진 이름들이다.

   
▲ 5.18무사고 북한 ⓒ뉴스타운

아래에 보이는 물체는 북한의 평양 룡성기계공장에서 만든 1만 톤 프레스다. 윗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5.18청년호'라는 글귀가 보인다. 5.18광주사태를 기리기 위해서 김정일이 직접 5.18청년 호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91쪽)  

   
▲ 5.18크레인 ⓒ뉴스타운

어느 일 잘하는 생산직장에다가는 '영예의 5.18청년직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서 부르게 하고 있다....1980년대 초반에 북한에서 나왔던 당시의 간부용 강연 자료를 보면 김일성이가 당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에서 직접 발언한 내용이 실려 있다.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광주인민봉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우리 혁명 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위로하자는 것이 '5.18무사고 정시견인초과운동'속에 있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274-275쪽)

●무기고는 북한특수군이 털었다는 증언

그의 말에 의하면 당시 남한 봉기자들이 무기고를 털어서 총을 주어도 잘 받지 않았다고 했다.(34쪽)  

남조선에 숨어있는 지하조직들과 협동해서 무기고를 탈취하고, 또 사람들을 죽이면서 광주인민들을 자극했다고 하였다. 강원도 어느 탄광에서 일어났던 봉기에도 참가했다고 하였다.(37쪽)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 사업이 마무리 되었다.(78쪽줄)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209쪽)  

탈취한 장갑차는 시민군들이 기술부족으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북한 특수부대요원들의 몫이었고 군용트럭들도 일부는 북한요원들이 사용하면서 대부분은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어... 항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319-320쪽)  

●북한 중앙TV가 방영한 여성학살에 대한 증언

5.18봉기가 일어난 다음날부터 북한의 TV는 다른 것은 방송하지 않고 매일 광주봉기에 대해서만 중대 방송을 하였다....남한의 공수부대들이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머리를 해머로 까서 죽이는 장면을 비롯해서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들만 골라서 연속적으로 방영 하였다.(206-207쪽)  

거의 매일 톱뉴스로 장시간을 중계 하였다. 몇 시, 몇 분에는 전라도 광주의 도청을 봉기군이 장악하였고, 또 어디 어디를 장악하였다고 하면서 시시각각으로 특종보도를 진행하였다. 남조선 국군이 광주의 봉기자들을 무참히 학살한다면서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 등, 끔찍한 장면들을 방영하면서 전두환 괴뢰도당이 애국 시민들을 총칼로 진압한다고 하였다.(360쪽)  

장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장면과 처녀의 옷을 발가벗긴 다음 자궁 안으로 장검을 깊숙이 박아 넣는 장면은 아무리 남자고 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정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고 몸서리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까지 잔인한 방법으로, 여자들만 골라서 무참하게 죽이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299-300쪽) 

이런 끔찍한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한 목소리로, "국제적인 식인종인 미국 놈들의 식민지로 있는 남조선 괴뢰도당들은 정말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들이나 다름이 없다. 아무리 지독한 살인백정이라고 해도 어떻게 백주 대낮에 여자들만 골라서 발가벗기고 도끼로 내리쳐서 죽이며, 살겠다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처녀의 젖가슴까지 도려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규탄하면서 남조선괴뢰군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222쪽) 

 5.18광주사태가 끝난 지 30년이 다된 지금에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생생한 것은 매일 TV에서 방영하던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여자들을 살인하는 장면을 반복 방송 하면서 남조선 괴뢰군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짐승도 치를 떨 정도라고 저주를 퍼 붙던 방송원의 격앙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397쪽)  

●교도소 습격에 대한 증언

안창식 일행은 전라도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남조선의 교도소)에 죄 없이 감금되어 있는 혁명적인 투사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안창식의 일행들도 참가했었고 그중 한명이 심한 중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총탄이 복부중심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그 사람은 과다출혈로 치명상이었다고 했다.(83쪽) 

●문익환에 대한 증언

(공화국 영웅 평양사자) 자서전의 내용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그가 남조선에 내려와서 대남공작을 시작하면서 진행한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그의 아버지 친척들의 이름을 비롯해서 자기가 공작한 대상들의 이름이 개별적으로 적혀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내 머리 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 속에 있던 죽은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었다. 1989년인가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과 만났을 때 나는 '평양사자'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이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던 기억이 있다. 어렴풋이 생각되는 내용이지만 '평양사자'가 남파되어 문익환을 만나서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하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생의 마감까지 수령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였다.(142쪽)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

   
▲ 수많은 광수들 ⓒ뉴스타운

사진에 주동자로 보여지는 수백명의 인물들 중에 광주 시민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이 광수(북한특수군)다. 뉴스타운이 이미 시위 주동자 4백여명을 일일이 찍어서 북괴 특수군 광수라고 밝혔는데, 이 사람들 중에 정말로 광주 사람들이 있다면 5.18단체에서 그게 자신이라고 밝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남북한에서 5.18 영화를 만들었지만, 그 곳에도 영웅은 없다. 주동자도 지휘부도 없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항쟁? 이상하지 않은가?

   
▲ 거리 청소하는 계엄군(공수부대원)들 ⓒ뉴스타운

광주의 거리청소를 하고 있는 공수부대원들 이 사람들이 여성의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냈다고? 여성의 유방과 음부를 칼로 도려냈다고?

   
▲ 전남도청 TNT ⓒ뉴스타운

전남 도청의 TNT, 이걸 민간인들이 했다고?

   
▲ 북한 특수군들 ⓒ뉴스타운

▲지휘부도 없이 이런 작전을 수행 했다고? 아시아자동차에는 09시에 대학생(?) 600명이 집결했다. 당시 광주의 대학생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14대의 지프차와 눈이 반짝이는 600명은 아시아자동차의 장갑차 4대와 374대의 군용트럭을 탈취하고, 동시에 운전하여 곳곳의 무기고 44개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서 5,200여정의 무기를 턴 것이다.

●가장 의문스러워하는 질문

북한특수군 600명설의 주요 의문: 얼마 전 북한군의 귀순노크 사건이 있었고,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문 앞까지 왔고, 울진-삼척에 130명의 람보부대가 양민을 학살한 사실 등을 보면 600명이 6개월에 걸쳐 투입될 수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실을 어떻게 당시의 군과 정보기관들이 감지하지 못했으며, 5.18에 대한 수사 및 재판이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지만원 박사가 찾아낸 북한군 600명의 활동 기록을 정보분석가들과 검찰, 판사들이 찾아내지 못했는가?

답변: 당시의 정보분석자들은 지만원 박사처럼 북한자료, 통일부자료, 일본자료, 그리고 10만여 쪽에 달하는 수사기록 등 다양한 정보를 놓고 12년 동안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타난 상황자료를 단기간에 정리해서 쫓기듯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들의 분석력은 분석학의 대가인 지만원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했다. 예를 들면 검찰의 상황일지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5월 18일 오전 9시경, 대학생 200여명이 공수부대 제7여단 35대대가 집결해 있는 전남대 정문으로 가서 도서관에 간다고 시비를 걸었고, 계엄군이 귀가하라고 단호하게 말하자 가방에 준비해온 돌멩이를 일제히 던져 공수부대 7명에 부상을 입한 후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쪽으로 달려갔다.", "5월 21일 대학생 300여명이 광주 톨게이트에 매복해 있다가 오전 08시경에 톨게이트를 통과하는 20사단 지휘부 부대를 습격하여 사단장 지프차를 포함하여 지프차 14대를 탈취해 가지고, 방위사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갔다. 09시, 아시아자동차에는 또 다른 대학생 300여명이 대형버스 5대를 타고 도착하여 대학생은 총 600명이 되었다. 아시아자동차에서 이들이 탈취한 차량은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다."

1985년 작성된 안기부 상황일지에는 5월 21일 12시에 나주경찰서 무기가 털린 사실로 시작하여 17페이지에 걸쳐 털린 무기고 이름과 탈취된 무기 및 수량이 기록돼 있었다. 그들이 정리한 것은 탈취된 무기 별 총수량뿐이었다.

반면 지만원 박사는 이 자료들로부터 "5월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새로운 정보를 도출해냈다. 여기에 북한 자료를 보니 6개의 무기고가 더 털렸다. 그래서 44개 무기고가 털렸다고 정리한 것이다. 털린 무기고 이름과 털린 무기량을 기록만 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다. "5월 21일,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전남 17개 시군에 산재한 38개 무기고가 털렸다"는 것이 진짜 정보다. 여기에 광주에서 시위일선에 섰다가 사망한 사람들, 군사재판에서 처벌을 받은 사람들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모두 합쳐봐야 불과 404명이라는 사실을 보태보라. 이어서 여기에 위 톨게이트에 관한 정보와 아시아자동차에 관한 정보를 합치면 북한특수군 600명의 실루엣이 나온다. 

현미경적 분석 능력이 정보기관들에 없었다. "08시에 대학생 300명이 매복하고 있다가 08시에 광주톨게이트를 통과하는 사단사령부를 공격해 지휘부 지프차 14대를 탈취했다"는 이 중요한 상황자료, 지만원에는 크게 다가 왔지만, 옛날 정보분석관들은 그냥 기록만 했다.

이 기록에서 지박사는 귀한 정보를 이끌어 냈다. 첫째, 광주의 이곳저곳에서 모인 양아치 계급들이 어떻게 300명씩이나 집단을 만들 수 있을까? 둘째, 이런 양아치 계급들이 어떻게 20사단 지휘부가 08시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할 것이라는 극비 중의 극비 정보를 입수할 수 있을까? 셋째, 당시 멀리에서 경찰의 모습만 보아도 숨기에 바빴던 당시의 20대들이 감히 어떻게 전투서열이 높은 현역 20사단을 공격할 수 있을까? 넷째, 그들은 왜 이 지휘부 지프차들이 필요했을까? 다섯째, 이 어마어마한 지프차들을 본 아시아자동차 공장의 간부들은 무슨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만원 박사는 이런 것들을 생각했지만 당시의 정보분석관들은 그냥 지나쳤다.

아시아자동차에는 09시에 대학생 집단 600명이 집결했다. 당시 광주의 부나비들은 이렇게 많이 모일 수 없었고, 대학생들은 모두 숨어 있었다. 14대의 지프차와 눈이 반짝이는 600명의 모습을 본 아시아자동차 간부들은 4대의 장갑차와 374대의 군용트럭에 키를 꽂았을 것이다. 그들은 이들 378대의 차량을 동시에 운전하고 전국의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5,200여정의 무기를 턴 것이다. 이는 세계 최고의 특수부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공수부대 대대장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저런 작전 우리는 못 한다"  여기에 8톤 차량 7대분의 다이너마이트 조립에 대한 사실을 보태보라. 아마도 이 부분이 북한특수군을 증명하는 가장 큰 핵심일 것이다. 1980년의 5.18 재판에서는 김대중을 잡아넣기 위한 논리, 1997년 재판에서는 전두환을 잡아넣기 위한 논리 개발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런 기술적 측면의 자료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5.18은 북한특수군 600명이 남남전쟁을 유발시켜, 이를 남침전쟁으로 연결하기 위해 벌인 고도의 이간작전이었다. 광주인에 의한 독자적인 광주인 시위대는 없었다. 민주화운동도 없었다. 폭동과 살인과 방화가 있었지만 이를 지휘한 한국인은 없었다. 국가는 북한군 작전에 소모품으로 이용된 4,634명에게 초특급의 유공자 대우를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돈으로 학교를 만들고 책자를 만들고 영상물을 만들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주고 있다. 국가는 북한이 써준 글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썼다. 국가도 국민도 남북한-공산주의자들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만원과 500만야전군은 2014년 10월 24일에 펴낸 "5.18 분석 최종보고서"에 이어 2015년 3월 1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5.18 진실 대국민 보고회"를 통해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이 특수군 600명을 침투시켜 일으킨 게릴라 폭동이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다. 2월 15일에는 5.18 단체들과 조갑제에게 내용증명을 보냈다. 5.18은 북한의 대남공작이었음을 국민에 보고할 예정이니, 당신들은 5.18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것을 사실자료를 가지고 나와 증명하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과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과 절차 모두에서 5.18단체는 패했고 거짓이 입증 되었다. 한국민 중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죽이려는 적의 편에 서 있다. 이제 더 이상 속지 말아야한다.

   
▲ 5.18의 진실 대국민 보고서 ⓒ뉴스타운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의 편에 서서 죽기살기로 싸우는 촛불, 그리고 전라도 사람들

5.18영화 '화려한 휴가'의 첫 장면에는 공수부대 대대장이 수송기 안에서 명령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광주 사람들 다 빨갱이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에 도착 하자마자 극장 안으로 달려가 젊은이들을 마구 패고 끌어내는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는 대한민국 국민의 아들들인 공수부대 병사들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각인시켰다. 이 영화를 광주에 가서 본 박근혜는 영화의 모략내용을 사실로 믿고 감동했다. 이를 관람한 천여만의 국민들도 박근혜 처럼 영화를 믿었을 것이다. 이런 모략이 진실처럼 둔갑해 있다.

광주와 전라도는 자기들을 죽이려던 자들의 편에 서서 죽기살기로 싸우면서 자기들을 살려낸 사람들을 욕하고 있다. 광주 사람들은, 몰살될 위기에 있던 당신들을 살려낸 배승일 문관을 아는가? 북괴특수군이 전남도청 지하실에 엄청난 폭탄을 조립해 놓고 있었다. 여차 하면 광주시를 히로시마 처럼 날려버리고 이를 계엄군 소행으로 뒤집어 씌우려 한 것을, 배승일 문관이 25-26일 양일간 목숨을 걸고 잠입하여 조립된 것을 해체했다. 다이너마이트 폭탄 2,100개, 수류탄 450개, 최루탄이 500개로부터 뇌관을 뽑아냈다. 배승일은 그 선행으로 보국훈장 광복장을 탔지만, 노무현이 박탈했다. 그 후 그는 소송을 걸어 훈장을 되찾았다.

공수부대원들도 당신들을 죽인 게 아니라, 당신들을 죽이려던 악당들과 싸웠고 당신들을 지켰다. 우리 국군들은 여성의 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여성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악당들이 아니다.

왜 아직도 적이 누구인지 분간을 못하는가? 전라도여, 광주여, 당신들은 당신들을 죽이려던 진짜 적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왜 믿고 싶은 것만 믿는가? 왜 적과 아군을 구분 못하고, 당신들을 죽이려던 적의 편에 서는가? 왜 의심 해 볼 줄 모르는가? 

전라도여 깨어나라, 광주여 제발 깨어나라.

   
▲ 수험의 신 5.18 귀족들 ⓒ뉴스타운

이방주 칼럼니스트 art144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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