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총리는 5.18 북한군 600명의 내막을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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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총리는 5.18 북한군 600명의 내막을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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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총리는 대한민국의 죽음을 재촉했던 국가자멸의 원흉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 ⓒ뉴스타운

5.18 폭동반란에 북한군이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추적하여 낱낱이 공개함으로써 왜곡 날조의 역사를 후세에 각인시키려는 저들의 사악한 음모를 분쇄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결국 끝나지 않은 5.18 폭동반란의 祭物로 변하고 말 것이고, 5.18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확대 시켰던 북한 악마집단이 원하는 한반도 적화통일로 귀결될 것이다.

5.18 광주에 개입했던 북한 김일성 집단의 1980년도 궤적은 물론 김일성 세습살인독재 체제가 무너지면 백일하에 드러날 일이니, 5.18 폭동반란의 범죄자들, 민주화 광신도들, 종북좌익 반역자들, 5.18에 기생하는 정치 사기꾼들, 그들 모두는 21세기 대명천지에 아직도 민주를 팔며 김일성 왕국 파멸이 두려워 사사건건 친북행각이다.

5.18 관련단체는 그들이 주장하는 36년 전의 광주폭동반란 속에 엉성하게 감춰진 북한군의 개입 사실들이 혹시나 세상 밖으로 튀어 나올까 하루하루 불안하고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입증이나 하려는 듯이 날이 갈수록 그들의 5.18 聖域化 공작과 왜곡 날조된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세뇌 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오죽하면 김대중의 영원한 대변인 박지원이 국회의원 신분을 이용해 5.18 북한군 개입 논쟁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5.18 민주화운동특별법 개정안”까지 입법하여 법으로 국민들의 5.18 북한군 개입 역사연구 자체를 막으려 하겠는가? 김일성 악마집단 북한이 할 짓을 김대중 무리들이 자청해 대한민국에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5.18 광주에서 연고대생 600명이라고 불렸던 북한軍에 대한 발자취를 파 헤쳐 보겠다

1) 전 북한군 상좌 김모씨의 증언 : 북한특수군의 1980년 5.18을 즈음한 침투준비와 당시 북한 동향에 대한 증언 :

“저는 산 증인으로서 5.18 광주폭동은 김일성이 고용하고 키워온 고용간첩 김대중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허물고 적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려 했던 반민족적 행위였다는 것을 만천하에 증언합니다. 광주폭동이 일어날 당시 저는 인민군 정찰국소속 124군부대 대남파견 전투원이었습니다. 저의부대에는 1979년4월에 “부대작전조 역량을 보충하고 작전조 인원들의 머리를 장발로 자를데 대하여” 라는 명령서가 하달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 머리를 장발로 자른다는 것은 자본주의 문화적 침투라 하여 사상투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민간인들 조차 장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남파견부대에 장발을 지시한 것은 1980년 5월 광주를 비롯한 한국전역에서 다발적인 폭동을 준비하여온 북한 최고수뇌부가 한국 머리스타일 문화를 인식한 사전준비였습니다. 1979년 12월 동계훈련기간 북한군은 대남파견부대인 저격병, 경보병 쌍방 기동훈련을 조직하여 평안남도 양덕군에 위치한 최고사령부 판정장에서 대남침투방법, 격술, 사격, 육박격투, 강행군, 각종전술, 지형학, 적군공작법,(심리전)등 준비상황을 판정받기 위하여 집결 하였습니다.

당시 인민무력부 판정단 성원들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몸소 지휘하고 계시는 남조선혁명은 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당장이라도 남조선에 달려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여야 한다”고 하며 긴장을 고조 시켰습니다. 훈련 기간 중 저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장발을 한 군인들을 목격 할수 있었으며, 당시 해주 연락소 전투원들은 전부 장발을 하고 훈련을 하였습니다.

훈련장을 찾은 인민군 정찰국장 오룡방은 군사간부강연회에서 말하기를 “1974년 봄에 남조선에서 대규모항쟁을 준비 하였는데 실패하였다고 하면서 이번에는 무조건 성공 할 것이다”라고 장담 하였습니다. 저는1997년 평양 출장길에서 총참모부 모간부와 함께 전 인민군 정찰국장 오룡방 대장과 전124군부대 여단장을 하던 신수룡 상장을 만나 간담에 시간을 가졌습니다.

북한군에서 청와대 습격과 5.18 광주침투를 비롯한 내란작전을 직접 조직 지휘하여온 인민군 정찰국장 오룡방과 124군 여단장 신수룡은 당시 북한군 최고사령부 작전 조에서 김정일의 대남작전을 보좌하고 있었습니다.

오룡방은 저희들에게 “수령님께서 생전에 통일의 기회를 두 번 잃었다고 회고하시며 4.19와 5.18 때 더 많은 역량을 투입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하며 우리 군대는 70,80년대가 제일 전투준비가 잘 되여 있었다고 그때 통일 시켜야 했었는데 하며 후회 했습니다. 또한 인민군 총정치국 지시로 124군부대에서 한국에 파견 되어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사한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황해남도 삼천군과 안악군에 “남조선혁명가묘소”를 만들어 놓고 부대원들의 충성심교육과 계급교양에 이용하여 왔습니다.

60구에 달하는 묘소 중 12구 묘에 사망 일자를 1980년 5월로 표기 하였습니다. 북한 로동당은 광주5.18 사건은 수령님께서 구상하시고 장군님께서 진두지휘하신 남조선 혁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선전하며 김정일의 우상화 교육의 장으로 이용 하였습니다.”

2) 탈북여성 교육자 이모씨의 증언 : – 북한특수군으로 5.18 광주에 침투, 작전을 수행하고 월북했던 내연남으로부터 들었던 진술 (신포 출발 동해루트를 통해 침투했던 300여 명에 대한 증언):

“위에서도 잠깐 이야기한바 있지만 남조선에 와서 새로운 생활을 위해서도 분명히 꺼내지 말아야 할 아름답지 못한 개인비밀을 누구의 권유도 없이 스스로 꺼내는 것은 광주사건의 실체에 대해서 보다 진실하게 독자들에게 말해주고 전달하기 위해서 이다. 독자들이 지루해할 것 같아서 더 길게 설명을 안 하겠지만 고등학교 졸업시절에 은인으로 나타나서 나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두 아이의 아빠가 바로 5.18 광주사건 때 북한의 임무를 받고 남조선에 내려 왔다가 부상당한 몸으로 북한으로 돌아가서 영웅칭호를 받은 당사자이다.

합법적으로는 남편이 아니 었지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낳은 두 아이의 아빠 이면서 평생에 한번 만나서 첫 정을 바친 남자이기도 한 사람이다.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서 3대혁명소조생활을 할 때나 첫 아이를 낳을 때만 해도 나는 그 사람이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한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사전에 오빠 한테서도 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정도로만 말을 들었지 광주사건에 참가하고 영웅칭호를 받았다는데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언질을 받은 바가 없었다.

내가 남조선에 와서 이런 내용을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고 그 사람이 말하는 내용을 기억해 둘 수도 있었겠는데 그냥 재미 있는 전투일화처럼 듣고 스쳐 보내다 보니 참으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10년을 훨씬 넘기는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그 오랜 시간의 경과 속에서도 내가 직접 그 사람으로부터 들은 5.18 광주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머릿속에 대부분 남아있다.

그러나 필자가 광주사건에 참가했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파악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는 만큼 경험자 이상으로 여기에 기술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며 독자들은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1968년 1월 21일 남조선 청와대 습격사건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 사건의 내용이 남조선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테러로 국제사회에 여론이 확산되자 북한은 황해북도 연산주둔 124군부대를 해산하고 1970대 초에 북한 함경남도 덕성과 량강도 후치령 인근 에다가 해산된 기존의 124부대의 기능을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비밀부대를 극비리에 조직하였다.

또한 1970년대 중반에는 평안북도 정주, 동림 일대에 남조선 종심에 대한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정예특수부대인 일명 자살부대라고도 불리던 ‘당원사단’이라는 최정예부대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인 1966년 가을에 조국을 위해 아들을 바친다는 부모의 서약과 함께 조국을 위해서 죽어야 되는 기구한 운명이 되여 자살부대나 다름없는 국가보위부 소속 첩보훈련소에 모집되어갔다. 그가 간곳은 서해 바닷가의 어느 이름 없는 섬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백여 명의 같은 또래 어린 동료들과 함께 고된 훈련을 받았다.

당사자의 말에 의하면 그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채 극비에 은폐되어 있는 생체실험장도 있다고 한다. 정신훈련교육은 처음부터 조국을 위해서는 필요하면 부모와 처자식도 죽여야 하고 친구도 무조건 죽여야 된다는 내용이었다. 생전처음 보는 코가 큰 사람들이 와서 미국 말을 가르치고 일본에서 납치되어 온 사람들과 남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나라의 말들을 어린 훈련병들에게 체계적으로 교육시켰다.

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후에 소문이 났지만)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 당할 때까지 근 2년 동안 대원들에게 살인적인 훈련을 가르쳤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전부대가 비상대기상태에 돌입해 있던 때인 1979년 11월 하순쯤에 그가 책임지고 있는 타격대에 폭풍명령이 떨어졌다. 준 전시상태에서 소부대 기능을 수행하는 타격대를 대상으로 제한적인 폭풍명령이 떨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급히 대원들에게 비상소집명령을 내리고 지휘부에 달려가 보니 부대지휘관이 아닌 상급기관에서 내려온 전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낮 설은 지휘관이 긴급명령을 하달하기 위해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급부대 지휘관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부대의 전투준비상태와 각기 타격대들의 기동성 및 전투임무 수행능력을 점검할 목적으로 임의의 소부대를 예고 없이 지명하여 전투력상태를 판정한다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타격대의 작전구역은 신포시 앞바다에 있는 마양도라는 섬이며 그날 밤중으로 현지로 이동하여 대기상태에 있을 것을 명령하였다. 그는 상급지휘관의 명령대로 즉시 타격대를 출발시켜 그날 새벽녘에 신포시 마양도에 전개되어 있는 해군기지에 도착하였다.

도착 이후 30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될 무렵 사복차림을 한 사람이 나타나서 이 시각부터 타격대는 두 개조로 나뉘어 작전에 임한다는 지시를 전달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름을 호출했고, 호출된 사람들은 대로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 그들보다 인원수가 많은 다른 조는 대기상태에서 차후 명령을 기다릴 것을 명령했다.

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 어떤 임무가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당시로써는 아무도 모르고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 그들이 남쪽으로 급히 파견되게 된 동기에 대해서 잠깐 설명을 보태면 북한정권은 남조선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사살되고 전두환 군부가 등장하면서 조성되고 있던 복잡한 정세와 정치적 혼란이라는 적절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후를 조종하여 국가전복을 시도하려는 구체적인 작전을 사전에 계획하고 있었다.”

3)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의 발표에서 북한특수군 침투 증언 :  5.18 광주에 북한군 침투에 대한 증언 (남포 출발 서해루트를 통해 침투했던 300여 명에 대한 증언) :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광주에 투입된 북한 특수부대들의 실무 작전에 대한 기록은 현재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5월10일 북한군 정찰국 소속의 황해북도 신천군 주둔 제1321부대(일명 신천복수대대)의 인원 300명이 폭풍명령을 받고 남포시 와우도 인근 지역에 집결하였다. (서해루트를 통해 침투시킨 300명)

신천보구여단 300명을 포함하여 남파된 특수부대인원 총600명이 남포에서 출발하였다고 부분적으로 기록이 있으나 광주에 침투되었던 증인들의 자료에 따르면 신천복수여단 외 타 여단들에서 차출된 300명의 인원은 동해안의 루트를 이용 했으며 함경남도 신포시 마양도 잠수함기지에서 출발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동해루트를 통해 침투시킨 300명)

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배동하여 김중린, 이하일이 참가 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년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이날 환송에서 김정일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천의 대형 뜨랄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탄광복같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 5월 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 70여명은 광주에서 죽은 40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300여 명 북한특수군의 서해루트를 통해 광주에 침투했던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의 증언)

4)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 조사 92-93, 5월 21일 0800경 :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 인솔대가 광주공단입구에서 진로를 차단한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공격을 받고 사단장용 지프차를 포함한 지프차 14대를 탈취 당했고, 그 차량들이 정체불명의 시위대 300명을 태우고 아시아 자동차공장에 도착하였으며, 이들과 또 다른 300명은 고속버스를 타고 그곳에 합류한다. 도합 600여 명이 무기탈취의 현장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 집결했다.

5)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84, 5월 21일 9시45분경 :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300여명이 잽싸게 승차 하였으며, 이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다시 가서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 등 모두 80여대를 징발, 차량에 가득 탄 중.고생과 젊은이들은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고 각종구호를 외치며 오전 중에는 외곽지역의 시민들을 동원하여 수송하였다.

6) 전교사 작전일지, 5월 22일 07시50분경 :  폭도 300명 탑승한 군용차 45대 송정리역 집결, 공포발사.

7) 김대령 저, 역사로서의 5.18에서, 5월22일 0750분경 : 광주시민들을 길거리로 이끌어 냈다는 전옥주의 선무방송은 연고생 300명이 송정이 쪽에서 오고 있다고 방송한다. 후에 전옥주는 모든 선무방송 내용은 누군가가 전해준 쪽지에 의해 읽혀졌다고 한다. 당시에 광주의 증심사라는 절에는 간첩 손성모가 승려로 위장하고 북한군의 광주 침투를 안내 했었다고 한다.

8) 조선로동당 출판사 1985, 34-35에서 :  북한도서 “광주의 분노”는 시민 군 600명이 21일 오전 9시부터 무기탈취를 시작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 때부터 봉기 군들은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놈들의 무기고를 본격적으로 들이치기 시작하였다.

폭동군중들은 괴뢰들의 군용차량 공장 인 ‘아시아 자동차공장’을 습격하여 314대의 군용차량을 로획하였으며, 그 밖에도 414대의 각종차량들을 탈취하였다. 봉기 군들은 이 로획한 차량들을 타고 다니며 놈들의 무기고들을 들이치고 많은 무기를 로획하였다. 600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의 무기고를 기습하여 숱한 무기를 탈취하였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되어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내었다.”

9)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2016년 6월 26일 현재까지 5.18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군(일명 광수) 중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에서 사진 기록에 의해 밝혀낸 인물들만 477명에 이른다. 그들은 대부분 북한에 현존하는 권력실세로 김정은 체제를 지탱하고 있으면 일부는 사망했다.(예: 당시 북한군 총 사령관 리을설은 2015년 원수 계급장을 달고 사망 했음)

가장 무서운 현실은 5.18 북한군 광수 중 현재 대한민국에서 탈북자 신분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국가 기간전략연구소 혹은 경제 산업 각 분야에 침투되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음흉한 존재들 이른바 60여명에 달하는 서울광수들이다.(5.18 북한군에 대한 사진자료는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게시판을 참조)

남북한 당국의 공식 기록과 일반인들의 북한군(연고생 600여 명)에 대한 증언에서의 300명과 600명이라는 숫자는 모두 일치하며, 그들의 신출귀몰한 무기탈취와 도시게릴라 작전, 광주교도소 습격 등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된 특수군인들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록들이다. 그런데 5.18 기념재단 사람들은 그렇게 혁혁한 공을 세워 계엄군을 벌벌 떨게 했던 소위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을 단 한 명도 대한민국 국민 앞에 내 세우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들 모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북한군이었으며, 만일 그것을 5.18 관련단체가 부정한다면, 그들 600여 명은 모두 귀신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5.18 기념재단, 당신들 언제까지 귀신푸닥거리로 대한민국 국민들을 농락하면서 그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거짓말을 계속 할 것인가? 중도 기회주의 대통령 박근혜, 관료주의에 물든 황교안 총리, 그들은 모두 북한 핵과 미사일이 대한민국을 위협한다고 하면서 오직 국민의 단결과 화합만을 외친다. 참으로 옹졸하고 좁쌀 같은 위인들이다. 5.18 광주는 내부의 적이다.

그들은 남북전쟁이 재발하면 대한민국의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 국가안보, 단결과 화합을 외치면서 5.18 북한군 개입이라는 남북합작 대한민국 정부전복 역사에 침묵하거나 언론탄압에 앞장선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황교안 총리는 대한민국의 죽음을 재촉했던 국가자멸의 원흉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글 : 대한민국대청소500만야전군 만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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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나푼수 2016-07-16 04:4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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