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배후 조종 총책은 간첩 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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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배후 조종 총책은 간첩 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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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반정부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이 개입했다

▲ 4.19 자료사진 ⓒ뉴스타운

4.19는 간첩세력이 일으켰다. 이 땅의 모든 소요는 100% 간첩 소행

지난 3월 14일, 육군 신병교육대에서 4.19 혁명과 5.18 광주민중항쟁을 "북한 간첩이 선동한 폭동"이라고 교육한 사실이 보도됐다. 14일자 '한겨레'에 따르면, 지난해 5월 경기 고양시의 한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곽모씨는 '북한 이탈주민 초빙교육'을 받던 중 '북한군 정훈장교 출신의 새터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강사로부터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은 북한 간첩들이 남한에 넘어와 사람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강사는 더 나아가 "폭동을 일으키고 죽은 북한 간첩들을 위로하는 전시물을 북한에서 봤다"고 까지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교육생인 곽씨는 "우리 헌법에도 명시된 4.19 혁명과 이미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5.18을 부정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한다.  

곽씨는 국방부에 민원을 제기, 해당 강의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 했고 국방부는 지난달 12일 뒤늦게 잘못을 시인했다. 국방부는 답변서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 용기를 높이 평가 한다. 부대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점 유감"이라며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다. 육군도 '한겨레'를 통해 "북한 이탈주민 안보강사가 법적·역사적 평가가 끝난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관적 경험만으로 강의한 사실이 있었다."며 "북한 이탈주민 안보강사를 더욱 엄정하게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한다. 

무기만 사재고 정신은 텅 비어 있는 부르조아 군

해방 후의 역사는 북한의 끝없는 공작과 이를 퇴치하기 위한 남한의 토벌로 점철돼 있다. 해방 후 6.25 직전까지 군은 4차례씩이나 숙군작업을 해서 빨갱이를 색출했어도 6.25가 터지자 전쟁을 간첩이 지휘하는 드라마가 펼쳐 졌다. 1948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 빨치산에 의한 무장폭동이 발생했다. 이어서 10월 19일,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발생했다. 김일성과 김구, 김규식 등의 방해공작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건국 한지 불과 2개월 만에 군 내부의 반란이 일어 났으니 이승만 대통령이 얼마나 긴장 했겠는가? 남과 북에서 협공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정부는 전군적으로 숙군작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9월부터 육군 정보국 내에 특별 수사과를 설치하여 1949년 7월말까지 4,749 명에 대하여 총살, 유기형, 파면시켰다. 숙군의 태풍이었던 것이다. 폭동에 가담했던 좌익 군인들이 산 속으로 도망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1949년 5월, 2개 대대 규모를 만들어 월북까지 했다. 반란군을 토벌할 임무를 받았던 토벌사령관 송호성은 6.25가 발생하자 서울에서 인민군으로 전신하여 인민군 소장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우군 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이었다. 정부는 국가보안법을 만들어 1948년 12월 1일부터 시행하면서 6.25 직전에 이르기까지 4회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하여 군내의 좌익들을 청소 했지만, 6.25가 발발하자 한국군은 간첩이 지휘했다는 흔적들이 매우 많이 나타났다. 군은 이런 현대사 영구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만 군장성들은 골프치고 술 마시는데만 정신이 팔려 있다. 

4.19는 확실하게 북한이 일으켰다

1977년 평양의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이 책의 235-270쪽에 수록돼 있는 이 책의 부록인 '전후 남조선청년학생들의 주요투쟁일지'가 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부터 1974년까지 20년에 걸쳐 무려 344건의 학생운동이 수록돼 있다. 북한이 이렇게 자세한 역사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은 남한 학생운동을 북한이 지휘했고 북한이 그 기록을 정리한 '북한의 역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특히, 이 책의 229쪽 하단-230쪽 상단에는 남조선청년학생들의 투쟁 전략과 전술이 요약돼 있다. 우리가 남한 사회에서 산발적으로 보았던 것들이 북한 자료들을 보니까 모두 북한이 만들어준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조선 청년학생들은 지난 투쟁 행정을 통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남조선의 진보적 청년학생들은 우선 각종 형태의 합법 또는 비합법적 써클들과 연구회들을 수많이 결성하고 수령님의 위대한 주체사상과 혁명이론 그리고 전력 전술을 연구 체득하기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의 선진적 학생들은 진보적인 중학교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망라하여 1955년부터 '독서회'를 결성하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로작과 수령님의 혁명력사를 학습하였으며 공산주의 교양강좌까지 조직하였다."(120쪽)  

예를 들어 1960년에 발생한 학생시위 사건은 38개나 된다. 4.19 만이 아니었다. 2월 28일에는 경북고, 대구고 등 1,000여명이 시청광장과 도지사집 앞에서 학원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3월 5일에는 서울의 고교와 대학들이 민주주의 수호를 내걸고 시위했다. 3월 8일에는 대전고등학교를 비롯한 대전의 고교생 1,000여명이 학생에게 자유를 달라며 시위했다.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25,000여 학생-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했고 이 시위는 계속되어 4월 인민봉기로 이어졌다.  

3월 24일, 부산 고교생 1,000여명이 학원자유화를 외치며 시위했다. 이어서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35,000여 시민들이 이승만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 했다. 4월 18일, 고대 3만명이 정권타도를 외치며 시위 했다. 4월 19일, 서울에서 10만, 부산에서 7만, 광주에서 3만의 시민들이 정권타도 시위를 했다. 4월 20일, 서울의 학생 시민들이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하고 군경과 충동했고, 전주, 수원, 이리, 청주 등을 통해 남조선 전체에 확대 됐다.  

4월 21, 22, 23일에는 인천에서 확산, 4월 23일에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월 25일에는 서울의 1만여 학생들이 중앙청으로 진격하면서 경찰과 육박전을 폈고, 진보적 학생들이 "4.19 청년학생동맹"을 결성했다. 4월 26일, 서울 50만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경무대를 완전포위하고 경찰기관들을 습격했다. 4월 인민봉기의 절정을 이뤘고,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있었다. 이 이후로도 학생시위는 연말까지 24회나 지속되었다.  

이상이 북한 노동당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1977년에 발간한 "전후 남조선청년학생운동"에 수록된 남조선학생운동사에서 뽑은 4.19 주변의 학생운동 역사다.  

대좌출신에 공화국 영웅인 거물간첩 김용규는 "소리없는 전쟁"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시위대들은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통일을 외쳤다. 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1964년의 6.3 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 8월 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 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주: 최근 북한 교과서에 대한 연합뉴스 보도와 일치).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 였으며,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 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4.19 데모의 색깔이 이상한 이유

대한민국 역사 전체는 차치하고라도 1960년 한 해 동안에 발생한 학생 시위사건을 보면 4.19 이전에도 학생데모가 있었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경무대를 비워준 이후에도 학생데모는 연속해서 발생했다. 그렇다면 4월 전체의 학생데모는 3.15 부정선거 때문만이 아니었다. 3.15 부정선거는 순간적이고 극히 한시적인 구실에 불과했다. 1960년에 발생한 38개의 학생데모들은 모두가 붉은 데모였다.  

4.19 이전의 데모도 붉은 데모였고, 4.19 이후 즉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이후의 데모도 붉은 색깔의 데모 였다. 그렇다면 4월 전체의 데모가 붉은 데모 였던 것이다. 이 땅에서 민주주의를 즐기고, 그 가치를 김일성과 비교해서 음미하는 인간이라면 이승만에 대해 하루에도 열 차례씩은 절을 해야 할 것이다.

반면 이승만을 독재자로 모는 인간들은 남한의 민주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이 나라의 공산화를 위해 몸 바치는 열등 인간들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승만을 깔고 앉아 자기들을 이승만 위에 세우려고 하는 좀비인간들을 곱게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잘난 데모 하나 한 것을 가지고 얼마동안이나 울궈먹어야 직성이 풀리겠는지 그게 알고 싶다. 나는 이런 인간들을 거리의 건달 이상으로 보아주지 않는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불만을 4.19폭력시위로 점화시킨 자들은 간첩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논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1946년 대구폭동을 주도했던 인물은 간첩 이석(李錫)이었다. 1972년 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 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해방 후의 대구는 남한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세력이 들끓었다. 이명영에 의하면 간첩 이석(李錫)은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로 1946년 10월, 대구 폭동사건에 간여 했고, 중앙당 간부로 자리를 옮긴 후 체포, 투옥 됐다가 6.25 전쟁 때 구출되어 인민군을 따라 평양으로 월북했다.  

4.19 배후조종 총책은 간첩 이석

1955년 4월, 이석은 다시 경기도 화성군 남양만 쪽으로 상륙하여, 경남 마산에 아지트를 구축하고 2개의 친목계 모임을 통해 40명을 조직하여 의식화 작업을 벌였다. 3.15 부정선거에 규탄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 40명으로 하여금 마산사태에 적극 개입하여 사태를 격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대구폭동을 주도한 간첩 이석이 1955년부터 다시 경남에 본부를 차리고 국가전복을 위한 또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1960년 4월 11일, MBC는 마산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 부위에 박혀 있는 김주열(마산상고)의 시체가 떠올랐다는 방송을 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4.19가 촉발됐다. 최루탄은 곡사포 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 처럼 쏘지 않는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퉁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다. 이는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대규모 시위의 불쏘시개는 언제나 시체가 담당했고, 따라서 간첩들은 시위를 촉발시키기 위해 언제나 시체를 만들어 냈다. 이명영에 의하면 3.15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점화시킨 존재가 바로 간첩 이석이 이끄는 간첩부대 였다는 것이다.  

1980년 4월 17일, 김대중은 서울대 학생회 초청 연설에서 이런 선동을 했다,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신이었다." 김상진은 서울농대 학생으로 1975년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를 반대한다며 분신자살을 했고, 이로 인해 수그러들던 1970년대의 학생 시위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 김대중은 바로 이런 희생자들이 또 다시 등장하여 혁명의 불을 지펴야 한다고 선동했고, 그런 선동은 1980년 5월의 무법천지를 이끌어 냈다.  

군은 무기만 사재지 말고 역사 연구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빨갱이들에 놀아나지 말고. 전두환은 이런 연구와 교육을 소홀히 해서 지금 빨갱이들에 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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