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북한특수군 600명을 증거하는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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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북한특수군 600명을 증거하는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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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은 김대중 추종자들과 간첩들과 북한특수군 600명이 연합하여 일으킨 국가전복 목적의 폭동작전이었음을 당당하게 입증한다

1995년 7월 18일에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 검찰부가 공동으로 내놓은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1985년 5월 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2001-2006년에 걸쳐 5.18 기념재단에서 발간한 "5.18의 기억과 역사 1,2권", 전남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5.18 항쟁증언자료집 I-IV 권"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 역사책들에서 뽑아낸 따끈따끈한 증거들이, 5.18은 김대중 추종자들과 간첩들과 북한특수군 600명이 연합하여 일으킨 국가전복 목적의 폭동작전이었음을 당당하게 입증한다.  

증거1 : 무시무시한 계엄령이 선포됐던 1980년 5월 17일 밤중,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 운동권들은 모두 지하로 숨거나 예비검속에 걸려들어 심한 고문들을 받았다. 광주 운동권은 잡혀갔거나 모두 숨었고, 교수, 대학생, 지식인들이 다 숨었다.(5.18 기념재단 "5.18의 기억과 역사 1,2", 전남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한 "5.18 항쟁증언자료집I-IV"). 이런 공포의 시간대인 1980년 5월 18일 오전 9:30분에 날렵한 학생집단 200여 명이 전남대에 집결해 있는 계엄군 병사들에 다가와 시비를 걸고 돌을 던져 부상을 입히고 계엄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충장로와 금남로로 달려가 대기하고 있던 다른 대학생들과 파출소, 건물, 차량 등에 불을 질러 광주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불을 지르면 반드시 사람들이 꼬인다. 이들 학생 무리들은 광주의 대학생들이 아니었지만 검찰보고서는 대학생이라고 기록했다.  

증거2 : 5월 21일, 서울을 출발한 20사단 지휘부가 08:00시 정각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중 극비 정보를 입수한 300여 대학생 시위대가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몽둥이, 화염병 등으로 기습공격을 가해 사단장용 지프차를 위시한 14개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군납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에 가서 이들 지프차를 증표로 보여주며 장갑차 4대와 트럭 374대를 탈취했다. 또 다른 300명의 대학생 시위대가 대형 버스 5대를 타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으로 와서 이날 09시에는 600명이 이곳에 집결하였다(검찰수사결과보고서, 5.18 분석 최종보고서의 사진들).  

당시 광주에는 이런 능력을 가진 600명이나 되는 대학생도 없었고, 이런 공적(功績)으로 민주화 인사가 된 광주인이 전혀 없다. 한국에는 이 정도의 배포와 훈련 수준을 가진 집단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5.18에 동원됐던 광주인들은 사리 판단 능력이 없는 10대 아이들이거나 20대 막노동꾼들이었다(사망자 및 유죄자 직업 및 연령 현황자료).  

단 한 번도 함께 모여 본 적이 없는 이런 10-20대 애송이들이 300명씩 2개조를 편성해 그 중 1개 조가 이동 중인 정규군 사단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대목이다. 그런데 이런 내용으로 보고서 문장을 작성한 검찰은 이들 600명을 그냥 광주학생 시위대라고 기계적으로 적기만 했다. 

증거3 : 이들 600명은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털어 5,408정의 무기와 탄약, 8톤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했다. 광주에 이런 조직력과 능력을 가진 대학생 시위대는 없었다(검찰수사결과, 안기부의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북한의 "광주의 분노"). 

증거4 : 검찰수사결과보고서, 광주의 분노, 안기부 상황일지, 광주일보 1996.10월 10일 특별보도 등은 "광주대학생들은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폭탄으로 조립하여 도청지하실에 쌓아놓았다"고 기록했다. 이런 기술을 가진 사람은 전라도 계엄분소에 오직 한 사람 5급 갑의 배승일 문관뿐이었다. 배승일 문관은 광주 수복 전 2일에 걸쳐 2,100개의 폭탄에서 뇌관을 분리했다. 북한특수군의 소행이었던 것이다.  

증거5 :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 있었을 때에는 이들 600명이 활약했지만,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기인 5월 22일부터는 600명이 모두 복면을 한 상태에서 광주시민들과 어울리지 않았다(검찰수사결과, 안기부 상황일지).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철칙 때문이었다. 광주 유지들이 모인 5월 22일부터 무기반납을 위해 이들 비범했던 대학생들을 만나고 싶어 찾았지만, 이들은 영영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광주인들은 광주 대학생들이 모두 꼭꼭 숨어 있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들 600명을 서울에서 내려온 연고대생 600명이라고 호칭했다. 5월 18일부터 21일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추방할 때 까지의 무서운 조직력과 전투력, 이는 광주시민들이 발휘한 것이 아니라 외지인 600명이 발휘한 것이었다.  

증거6 : 이들 600명은 5월 21일 오후와 22일 새벽 사이에 광주교도소를 6회 공격했다(검찰수사결과).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을 것이다. 이 무모한 작전은 북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 광주시민들 중, 북의 지령을 직접 받고 매우 무리하게도 야간에 광주교도소 공격을 지휘한 사람 없다. 

증거7 : 광주에는 장갑차 4대를 운전할 수 있는 장갑차 운전수 4명이 없었고, 이를 운전한 공적으로 유공자가 된 사람 없다. 

증거8 : 1980-81년 재판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5월 26일 낮과 밤에 개념 없이 설치던 20세의 구두공, 20대 중반의 화물차 운전수 등 개념 없고 뿌리 없는 떠돌이 노동자들이었다(처벌자 명단). 당시 정보 당국은 5월 18일-21일까지 화려한 파괴-선동-엽기살인 기술을 보였던 600명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잡지 못했다. 정보 당국이 잡은 폭도는 5월 22일 이후 어슬렁 거리며 개별적으로 들어왔던 10대 어린이들과 20대의 개념 없는 막노동자들이었다(처벌자 명단과 5.18 기념재단 자료). 

증거9 : 총에 맞아 사망한 광주시민의 70%가 무기고에서 꺼낸 총에 의해 사망했다(안기부 일지, 계엄사). 광주시민이 광주시민을 조직적으로 쏠 수는 없는 일 아니 겠는가.  

증거10 : '5.18 분석 최종보고서' 사진들에는 광주인일 수 없는 얼굴과 포즈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수장갑을 끼고 장갑차 위에 기관총을 걸고 사격준비 상태를 유지하면서 눈에서 빛을 내뿜는 고도로 훈련된 몸매, 막대기 하나로 20사단을 습격한 날랜 몸매들, 육중한 유탄발사기를 한손으로 파지한 용병의 몸매, 복면한 얼굴들, 광주시민들의 구경거리가 된 집단행동, 북한식 제식걸음, 총을 거꾸로 메는 북한의 총 파지 방법 등을 보인 용맹한 전사 집단은 광주의 양아치, 구두닦이, 식당종업원, 석공, 목공, 구두공 등일 수 없다.

증거11 : 광주 5.18 묘지에는 한국인으로 판명되지 않은 시체가 12구 있다.  

증거12 : '광수(5.18 광주 북한특수군)' 한 사람이 2006년 탈북 해 지금 서울 근교에 살고 있다. 2013.5.15. 채널A의 '김광현의 탕탕평평' 프로가 가명 김명국을 소개 했다가 박근혜정부로부터 중징계를 당했다.  

증거13 : 2013년 4월 22일의 TV조선 방송에 황장엽을 가장 먼저 접촉했던 전 월간조선 편집장 김용삼씨가 출연했다. 황장엽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황장엽은 김기자에 메모를 전달했다. 5.18에 대한 알듯 모를 듯한 메모였다. 김기자는 1996년과 1998년에 황장엽과 김덕홍으로부터 확인한 내용을 방송에서 밝혔다. "5.18은 북한이 배후조종한 후 계엄군에 뒤집어씌운 사건이고, 그 작전을 기획한 대남부서 사람들이 5.18 종료 직후 무더기로 훈장을 받고 술 파티를 했다."

증거14 : 북한은 해마다 5.18을 남한과는 비교 조차 안 될 거대한 규모로 북한 전역에 걸쳐 여러 날 기념하고, 북한에서 최고인 것들에는 5.18 호칭을 하사한다. "5.18 영화제작소" "5.18 청년호" ":5.18 땅크호" "5.18 누에고치반" "5.18 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

증거15 : 최첨단 영상분석 기법으로 발굴한 90명의 '광수'들, '광수'란 광주폭동에 개입한 북한특수군을 지칭한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찍힌 북한군 90명의 얼굴이 북한정권 실세를 구성하는 인민군 장군 등 핵심간부들의 얼굴과 정확히 일치함을 증명했다.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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